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삶과 문화] 중단의 결단

입력
2018.02.08 15:27
31면
0 0

성경에서 회개나 회심으로 번역되는 ‘메타노이아(metanoia)’는 철학에서는 대상에 대한 탐구에서 맥락에 대한 물음으로의 관점 변화를 뜻한다고 한다. 보리스 그로이스의 ‘코뮤니스트 후기(後記)’(김수환 옮김, 문학과지성사)는 언어의 창의적이고 전복적인 사용으로 가득 찬 책이지만, 저자는 이 말도 독특하게 전유하면서 소비에트 공산주의에 대한 기발한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소비에트의 붕괴와 자본주의로의 이행은 공산당 지도부의 메타노이아적 결정으로 일어난 평화적인 자기 폐지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곡예에 가까운 논리의 전개를 따라가다 보면 저자의 이러한 주장(농담?)이 반드시 황당무계하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인데, 유행하는 급진적 비판 이론들이 ‘차이의 무한 작동’이나 ‘무한한 혼종성’과 같은 실체화되기 어려운 이상주의 안에서 공회전하고 있다는 저자의 논지에 분명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다. 끝나지 않는 무한성에 맞서 어느 시점에서는 중단이나 종결의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말은 이상하게 신선하다.

저자는 예술의 실천을 예로 든다. 예술을 한다는 것은 사물들이 다른 방식이 아니라 바로 그 방식이어야 한다고 결정을 내린다는 것을 뜻하며, 여기에는 그 어떤 ‘객관적’ 근거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실천의 행위에서 본질적인 것은 어느 시점에선가 종결을 지을 결단을 내려야만 한다는 점, 즉 예술 작품 만들기를 중단해야 한다는 점이다. 표면적으로는 마감에 쫓겨서일 수도 있고, 돈이 부족해서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보리스에 따르면 “계속한다면 작품의 역설적 성격이 상실되어버리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예술적 실천의 중단 가능성 없이는 그 어떤 예술도 존재할 수 없다.” 작품의 역설적 성격? 내가 이해하기에 이 말은 세상의 테제와 안티테제, 그러니까 모순의 양측면을 동시에 사유하고 표현하고자 하는(이것이 아니라면 누가 예술을 하겠는가?) 예술의 무모함과 관계 있는 것 같다. 언어로 치면 역설을 통해서만 희미하게 가리켜지는 자리 말이다. 생각해보자. 소설은, 시는, 영화는 어디서 어떻게 끝나는가. 혹은 어떻게 끝나야 하는가. 온갖 사후적 비평과 검토가 가능하겠지만 창작 주체의 자리에서라면 단 한 가지 대답이 있을 뿐이다. “거기서 끝내야 할 것 같아서요.”

영화 제작 현장을 구경한 적이 있다. 예외적이다 싶게 마지막 촬영분 시나리오가 전날 준비되었다. 그런데 다음날 감독의 결정은 그 전날 촬영분에서 영화를 끝내는 것이었다. 준비했던 결말은 폐기되었다. 이 결정에 사실 그 어떤 ‘객관적’ 근거가 있었을까. 그 영화가 만들어내려고 한 세상의 꼴이 그저 거기서 그런 방식으로 끝나는 게 좋겠다는 감독의 직관 외에는. 다만 우리는 이런 모든 것을 예술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무언가가 예술인 척할 때 우리는 알아챈다. 예술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로. 보리스는 말한다. “예술 작품이 예술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예술이 아니라 키치이다. 예술이 예술 아닌 것처럼 보인다면 그건 그냥 예술이 아닌 것이다. 예술로서 인정되려면 예술처럼 보이는 동시에 예술이 아닌 것처럼 보여야 한다.” 이것은 말장난인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예술적 실천이 중단을 통해 모순과 역설의 모양새로 종결되는 것은 종종 우리 삶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모순의 확인에는 기실 매번 회심(悔心)의 결정이 필요한지 모른다. 변덕처럼 말이다. 이 변덕이야말로 충실성일 수 있다. 저자는 철학을 두고 “인간이 자기모순을 숨기지 않은 채로 그 모순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제도”라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에 우리가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 또한 얼마간 그러하지 않나 싶다.

/정홍수 문학평론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