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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의 길 위의 이야기] 아기엄마

입력
2016.12.11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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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원고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아서 노트북을 옆에 끼고 집 근처 카페엘 갔다. 나는 커다란 커피잔을 옆에 두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옆 테이블에 삼십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여자 셋이 앉았다. 그녀들의 이야기가 솔솔 나를 간질였다. 듣자 하니, 한 명은 아기엄마, 단발머리와 빨간 코트는 싱글이다. 아기엄마의 하소연이 시작되었다. “하루 종일 아기하고만 얘기해. 우리 아기 쭈쭈 먹자! 코 할 시간이에요! 쉬야했어? 하루 종일 그래. 그러니까 단어들을 다 까먹었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면 생각이 잘 안 나.” 단발머리는 작년에 다녀온 쿠바여행 이야기를 한다. 빨간 코트는 코타키나발루 비행기 표를 끊었다며 자랑이다. “남편 퇴근하고 난 다음에 아기 목욕 한 번 시켜달라 하면 막 짜증내. 온종일 회사에서 시달린 사람을 꼭 부려먹어야 하냐면서. 그럴 땐 정말 쥐어박고 싶어져.” 단발머리와 빨간 코트는 끄덕끄덕, 그렇구나, 힘들어서 어떡해, 대답은 하지만 사실 쿠바와 코타키나발루 이야기만 하고 싶은 모양이다.

아아, 나는 아기엄마를 당장 내 앞으로 데려다 놓고 둘이만 떠들고 싶었다. 아기 얼굴을 손수건으로 가리고 “우주 없다!” 외치고 (내 아기의 이름이 ‘우주’다) 다시 손수건 치우고 “여깄네!” 외치고. 그걸 하루에 오십 번쯤 하고 나면 내가 할 줄 아는 한국말의 절반은 까먹은 느낌이 드는데. 아기엄마는 아홉 시가 넘자 주섬주섬 일어섰다. “아기 벌써 잘 시간 아냐? 그냥 더 있다 가면 안돼?” 단발머리가 잠깐 붙잡지만 아기엄마는 한숨을 쉰다. “그래도 가야 해. 중간에 깨면 어떡해.” 아쉬운 얼굴로 그녀들은 인사를 했지만 아기엄마가 떠나고 난 뒤 단발머리와 빨간 코트는 한층 더 즐겁게 떠들었다. 내가 공연히 심술이 다 났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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