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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과 교수

등록 : 2018.03.19 14:50
수정 : 2018.03.20 10:11

[김월회 칼럼] 사람을 깊게 만드는 것들

등록 : 2018.03.19 14:50
수정 : 2018.03.20 10:11

전직 대통령의 검찰 출석 뉴스가 한창이던 그날, TV 화면 밑단에 속보가 떴다.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의 별세 소식이었다.

이내 그가 이룩한 업적이 자막을 타고 연신 흘렀다. 문득 영국에서 유학한 벗의 말이 떠올랐다.

벗은 지구의 대표적 명문인 캠브리지대에서 학업을 연마했다. 하여 그로부터 가끔 그 대학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와 더불어 명문대학의 조건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명문대학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해 얘기하는 자리에서였다. 스티븐 호킹이 캠브리지대에서 수학했음을 안 것도 그때였다.

한번은 벗이 교정과 기숙사를 이어주던 길 얘기를 꺼냈다. 그 길은 수년간 일상적으로 오갔던, 어디든 있을 법한 평범한 길이었다. 그러다 언제인가 그 길의 역사를 들었단다. 그것은 350여 년 전쯤 아이작 뉴튼이 다녔고, 한 세기 전쯤엔 러셀이나 비트겐슈타인 같은 철학자가 걸었으며, 동시대엔 호킹이 휠체어로 오갔던 길이었다. 그 이후로 그 길은 더는 그저 그런 길로 다가서질 않았다고 한다. 그 길을 오갈 때면 종종 왠지 모를 뿌듯함에 한층 자란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고 한다.

눈에 띄지 않던 역사가 환기되는 순간 평범한 일상에 깊이가 더해진 것이다. 그 깊이를 일상으로 접하며 자신도 깊어진 것이다. 거목 사이를 걷다 보면 어느새 거목이 된다는 서양 격언은 말본새만 그럴듯했음이 아니었다. 퇴계 이황이 도산서원을 ‘텍스트의 우주’로 빚어낸 의도가 선뜻 와 닿았다. 유교의 핵심 가치와 직결된 표현으로 건물 이름을 짓고, 성현의 깨달음이 서린 문구를 서원 곳곳에 빼곡하게 배치한 까닭이 명료해졌다. 입신양명을 꿈꾸든 은일의 삶을 꾀하든, 향촌 서생의 삶에 만족하든 천하경영에 헌신하든, 후학이 또 그들의 삶이 천도 곧 진리와 더불어 깊어지길 도모했음이다.

필자가 일하는 캠퍼스에선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기획이다. ‘1동’이나 ‘A구역’ 같이 몰가치 한 기호로 호명되고 ‘행정관’ ‘도서관’ 식으로 기능만이 칭해지는 공간, 유리나 금속처럼 차가운 거리감과 도도한 고립감으로 마감된 건물로 도배된 장소, 동선 설계부터 건물 디자인, 공간 배치, 조경에 이르기까지 격조와 조화 따위는 개에게나 던져준 듯, 잿빛 무심함이 빚어낸 교정. 그렇게 세월이 흘러도 역사와 문화가 퇴적되지 못하는 배움터에서 탈속(脫俗)의 순수가 운위되고 초월적 진리가 강조되는 이율배반. 대학이 평생의 삶을 떠받치는 원천이 못된 채, 더 나은 진로를 위해 거쳐 가는 옅고도 옅은 일회성적 과정으로 전락됨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게다가 우리 삶터에 횡행하며 일상을 채우는 말들도 ‘우리’에게서 깊이를 연신 덜어내고 있다. 누구보다도 속 깊고 폭넓게 또 드높게 헤아리고 말해야 함에도, 함량 미달의 정치인과 족벌 언론, 세습 재벌들은 편향되고 오염된 언사를 마구 쏟아낸다. 그저 중독성이 강할 뿐 결코 깊이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말들로 그들은 불신과 분노를 조장하고, 그에 편승하여 기득권을 지키고 늘려가고 있다.

우리가 기꺼이 속아주었거나 막아내지 못했기에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적폐다. 10여 년 전 우리는 그 ‘옅은’ 말들에 속아, 또는 기꺼이 속아주어 ‘깊이 없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았다. 대통령 후보 시절부터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을 긁어 모았다는 혐의를 받는 이명박 전 대통령 얘기다. 그런데 과연 그만 깊이가 없었던 것일까. 혹 유권자인 우리도 깊이가 부족했던 것은 아닐까. 어찌됐든 우리 사회가 그의 대통령 당선을 막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이들이 내뱉는 거짓과 갈등, 증오를 야기하는 언사가 꾸준히 먹히고 있기에 하는 말이다.

어쩌면 그런 말로 행세하기에 딱 좋은 시절이 펼쳐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혼밥’ ‘혼술’이란 표현으로 대변되듯 우리는 갈수록 고립적으로 살아가는 삶에 익숙해지고 있다. ‘LTE’ ‘기가 인테넷’ 등 즉시적이고 신속한 작동과 반응을 마냥 선호한다. 한결같은 반응을 보이는 인공지능에게서 사람보다 더 크고 푸근한 위안을 얻는 이들도 늘고 있다. 지식과 경륜을 힘들여 내 안에 축적할 필요도 줄어들고 있다. 이미 우리는 저렴한 비용으로 언제 어디서든 데이터의 바다에 편리하게 접속하며 이를 쏠쏠하게 활용하고 있다. 굳이 나에게, 또 삶터에 깊이를 가하려 애쓰지 않아도 너끈히 살아갈 수 있는 시대라는 얘기다. ‘옅은 말’, ‘옅은 삶’으로도 사회적 갑이 될 수 있는 이유기도 하다.

얼마 전 서울시는 조선시대 지도를 토대로 한양도성 내 옛길 620곳을 찾아냈다. 개중에는 18세기 무렵의 원형을 잘 간직한 길도 있다고 한다. 물론 그 길을 채운 모습은 서구화된 현대의 풍경일 것이다. 그럼에도 길이 남았기에 역사와 문화가 환기될 수 있었다. 그 사람은 시간의 두께 속에 진토가 되어 사라졌어도 그의 말은 남아 역사와 더불어 유전되듯 말이다. 그래서일까,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그러한 길과 말이 있어 사람은 비로소 사람일 수 있었다는 생각이 도리어 강해지는 나날이다.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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