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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의 저울] ‘종중’의 변천사… ‘딸들의 반란’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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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의 저울] ‘종중’의 변천사… ‘딸들의 반란’ 그 후

입력
2017.10.02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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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딸들의 반란’ 이후 여성도 종중원 인정

재산분쟁 여전하지만 법원 “여성이라 차별은 부당”

어머니 성씨 따른 자녀도 “종중 인정해야” 판결

그러나 ‘종중 유사단체’는 여전히 남성만 회원 가능

조상으로부터 뿌리 내린 자손임에도 여성은 오랫동안 종중(宗中)의 일원이 될 수 없었습니다. 공동 선조의 후손들이 선조 묘소를 관리하고 제사를 지내며, 이후에 재산도 나눠 갖는 이 단체는 가입과 탈퇴가 필요 없는 자연 발생적 집단입니다. 하지만 여성은 그 동안 당연한 권리를 누릴 수 없었습니다. 2000년 용인 이씨 사맹공파 출가여성 5명과 청송 심씨 혜령공파 출가여성 3명이 오랜 관습에 반기를 들기 전까진 그랬습니다. 그들은 종중이 종중 땅을 아파트 부지로 매각한 돈을 여성 자손에게 나눠주지 않자 “출가 여성에게 종중 구성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종중 재산을 차등 분배한 것은 남녀 차별”이라며 소송을 냈습니다.

당시 “성년 이상 남성만 종중원” 이라는 대법원 판례가 확고해 승소가 어려울 것이라고 점치는 시각이 우세했습니다. 여성들은 “변호사 구하기가 어려워 법무사를 알아보기도 했다”고 회고했고 실제 1,2심은 관습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그러나 2005년 2월 헌법재판소는 호주제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는 등 시대는 바뀌고 있었습니다. 같은 해 7월 대법원에서는 마침내 “종중원 자격을 성년 남자로만 제한하는 관습은 1970년대 이후 사회환경과 국민의식 변화로 법적 확신이 약화됐다. 헌법을 정점으로 하는 법질서는 가족 내에서 실질적 권리와 의무에 있어 남녀 차별을 두지 않고 있다”고 사건을 파기환송 했습니다. 이후에 소송을 제기한 여성들의 승리가 확정돼 ‘딸들의 반란’이라 불린 이 판결을 대법원은 ‘한국을 바꾼 시대적 판결 12건’으로 선정하기도 했습니다.

`딸들의 반란' 사건에 대한 대법원 선고 공판이 열린 2005년 7월 21일 오후 서울 서초동 대법원에서 전원합의체가 원심의 파기환송을 선고하자 청송 심씨 혜령공파 심정숙씨가 활짝 웃는 얼굴로 만세를 부르며 법정을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딸들의 반란' 사건에 대한 대법원 선고 공판이 열린 2005년 7월 21일 오후 서울 서초동 대법원에서 전원합의체가 원심의 파기환송을 선고하자 청송 심씨 혜령공파 심정숙씨가 활짝 웃는 얼굴로 만세를 부르며 법정을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종중 ‘꼼수’ 재산분배에 법원 제동

그리고 6년이 흘렀습니다. 여성 지위는 획기적으로 바뀌었을까요. 여성들은 종중원 지위는 얻었지만 재산분배에선 여전히 불이익을 받았습니다. 그만큼 오랜 관습의 힘은 무서웠습니다. 그때마다 법원은 종중의 성차별에 제동을 걸었습니다. 종중 재산을 여성에게 남성의 30%만 분배한 것에 대한 소송에서 2010년 대법원은 “단순히 남녀 성별의 구분에 따라 분배 비율에 차이를 두는 것은 정당성과 합리성이 없어 무효”라는 판결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재산 분배를 둘러싼 차별은 지금까지도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강릉의 한 종중은 2015년 토지보상금을 종중 행사 참여도에 따라 차등 분배하기로 총회에서 결의했습니다. 2014년 8월부터 2015년 7월까지 4차례 열린 종중 행사에 두 번 이상 참석한 종중원에게만 1인당 보상금의 100%를, 그 미만으로 참석한 종중원에게는 20%만 주기로 한 것이죠. 2명을 제외한 대다수 여성 종중원(62명)이 보상금을 20%밖에 받지 못했습니다.

의정부지법 민사합의11부(부장 정원)는 이에 대해 “토지보상금 분배 결의가 모두 무효임을 확인한다”는 판결을 지난달 7일 내렸습니다. 재판부는 “여성 종중원은 2016년 7월이 돼서야 종중원으로 인정됐으므로 그 전에는 종중 행사에 대한 통지를 받지 못했다”며 “종중 행사 참여도를 판단하기로 한 기간에 여성들이 종중 행사에 참여할 권리를 보장받지 못했다”고 종중의 ‘꼼수 재산분배’를 질타했습니다.

재판부는 또 “분배결의 당시 일부 남성 종중원들은 여성 종중원들을 분배 대상에서 제외하자는 의견을 피력했고, 이에 절충적 의견으로 종중 행사 참여도에 따라 재산을 나누자는 의견이 나온 점에 비춰 그 기준과 비율은 여성을 남성과 동등하게 대우할 수 없다는 일부 남성 종중원의 의사를 바탕으로 정해진 것으로 보인다”며 의사 자체에 정당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어머니 성 따른 자녀도 종중’ 판결도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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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바뀌면서 한층 진일보한 판결도 나왔습니다. 어머니 성을 따른 자녀를 어머니가 소속된 종중의 일원으로 인정해준 판결입니다. 이는 ‘딸들의 반란’ 대법원 판결과 함께 호주제 폐지 후 개정된 민법이 자녀가 어머니의 성과 본을 따를 수 있도록 규정한 데 따른 변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서울고법 민사18부(부장 노정희)는 최근 이모(29)씨가 종중을 상대로 “종원으로 인정해달라”고 낸 종원 지위 확인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습니다. 이씨는 2014년 자신의 성을 아버지의 성인 김씨에서 어미니 성인 이씨로 바꿨습니다. 아버지 성과 본을 따르더라도 자녀 복리를 위해서 법원 허가를 받으면 성과 본을 바꿀 수 있어 가정법원의 심판을 받은 겁니다. 성을 바꾼 이씨는 2015년 어머니가 속한 종중에 종원 자격을 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 당했습니다. “모계혈족인 이씨에게 종원 자격을 부여할 수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법원은 이에 “모계혈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종중의 구성원이 될 수 없다는 관습이 법적 규범으로서의 효력을 가진 관습법으로 존속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또 “민법은 부계혈족과 모계혈족을 차별하지 않고, 호주에 관한 규정도 삭제했다”며 “종원 자격을 판단함에 있어 헌법상 개인의 존엄과 양성평등의 법칙, 부성주의 및 성불변의 원칙을 완화한 민법의 규정과 개정취지 등을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재판부는 “자녀가 부모의 양계혈통을 잇는 존재라는 사실은 자연스럽고 과학적”이라며 “출생 시부터 어머니의 성과 본을 따르거나 출생 후 어머니의 성과 본으로 변경했다는 사유만으로 종중 구성원 자격을 원천적으로 박탈하는 것은 헌법상 평등 원칙에 부합하지 않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유사종중은 ‘남성만 종중원’ 인정, 악용도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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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에서 종중의 의무와 권리에 남녀 평등을 인정했지만, 남녀 차별을 인정하는 ‘종중 유사단체’라는 사각지대는 여전히 남았습니다. 목적이나 기능에서 종중과 차이가 없어도 공동 선조의 후손 중 일부에 의해 인위적으로 성립됐다는 게 확인되면 종중 유사단체로 간주됩니다. 대법원 판례는 이들에 대해 사적 자치 원칙에 따라 구성원 자격과 가입조건을 자유롭게 정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남성만으로 구성원을 한정하더라도 이를 양성평등 원칙을 정한 헌법을 위반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판결도 나왔습니다. ‘성인 남녀를 회원으로 한다’는 규약을 새로 만든 종중 임시총회 결의를 무효로 해달라고 일부 남성 종중원이 제기한 소송에서 수원지법 평택지원 민사합의1부(부장 박연욱)가 “임시총회 결의가 무효임을 확인한다”는 판결을 내린 겁니다. 여성들을 회원에서 배제해도 문제가 안 된다고 본 것입니다. 1994년부터 ‘OO이씨 OO공파 종친회’라는 명칭으로 종중 활동을 하던 이들은 2000년 “공동 선조의 만 20세 이상 직계남자”로 종중원 자격을 제한하는 규약을 시행하고 있었습니다. 이후 일부 종중원이 종중 재산을 빼돌려 업무상횡령, 업무상배임 등 송사에 휘말렸고, 이들을 배제한 채 열린 2016년 6월 열린 임시총회에서 회원을 ‘성인 남녀’로 하는 새로운 규약이 만들어진 거죠.

종중원은 곧바로 임시총회를 무효로 해달라고 소송을 냈습니다. 법원은 이들이 종친회 이름을 별도로 만들어 활동한 점, 종중원 전체 명부를 갖고 있거나 관리하지 않은 점 등을 들어 종중이 아닌 종중 유사단체로 판단했습니다. “종중 유사단체로 보는 이상, 당초 규약을 통해 일부 남성 후손에게만 회원자격을 부여하고 여성 후손에게 회원자격을 부여하고 있지 않더라도 그 회칙이 무효라고 볼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대법원에서도 2011년 “특정지역 내 거주하는 일부만 구성원으로 하는 단체는 종중 유사단체에 불과하고, 종중 유사단체 회칙에서 남성만으로 구성원을 한정하더라도 이를 양성평등 원칙 위반이라 볼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종중의 기능을 하는 단체라 하더라도 여전히 여성을 배제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는 셈입니다.

김민정 기자 fac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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