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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슬프지만 자랑스러운

입력
2017.08.21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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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택시운전사’ 포스터. 쇼박스 제공
영화 ‘택시운전사’ 포스터. 쇼박스 제공

매일 쏟아지는 국제뉴스를 볼 때마다 묘한 기시감이 드는 나라가 있다. ‘형제의 나라’ 터키다. 요즘 터키의 독재는 브레이크 없이 내달리고 있다. ‘쿠데타 참여 세력 500명 재판 회부’ ‘언론인 35명 무더기 체포’ 등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기사투성이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1년 전 군부 쿠데타를 진압한 뒤 올해 4월 개헌 쿠데타를 통해 ‘21세기 술탄’에 등극했다. ‘터키식 민주주의’라는 궤변과 함께.

37년 전 대한민국도 그랬다. 다른 점이라면 터키에서는 찬밥 신세가 된 군이 기어이 권력을 찬탈했다는 정도다. 사망 및 행방불명 318명, 부상 2,267명, 기타 희생 247명(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1980년 5월 광주는 핏빛으로 물들었다. 2017년 터키처럼 그 때도 국가폭력은 정당과 합법의 탈을 쓰고 있었다.

오월 광주를 영화 ‘택시운전사’가 다시 세상으로 불러냈다. 개봉 3주도 안돼 1,000만명이 영화를 봤다. 숫자는 공감을 뜻한다. 어떤 픽션과 견줘도 훨씬 극적이기에 상업적 성공의 충분조건이 됐을 것이다. 관객들은 전혀 합법적이지도, 정당하지도 못한 스크린 속의 야만에 노여워했다. 단 에르도안의 터키를 대하듯 한 발짝 떨어져서 말이다.

이제 광주의 그날을 좀 더 가까이서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연민 혹은 분노 같은 직관이 아닌 적극적 역사 해석 차원에서다. 얼마 전 한국에 단기연수를 온 한 일본 시민단체 대표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그는 같은 이유로 우리나라를 세 번째 찾았다. 활력 넘치는 한국의 민주주의(유신정권이 내세운 ‘한국적 민주주의’가 아니다)를 배우기 위해서라고 했다. “서양 민주주의와 비슷한 시민사회 활동이 아시아에선 불가능할 것이라고 낙담하던 시절 한국의 시민단체 활동가를 만나 광주민주화운동을 접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생각이 싹 바뀌었죠. 아시아 시민들도 민주주의를 실행할 수 있는 저력이 있음을 깨닫고 한국 근현대사 연구를 시작했어요.” 그는 이번에도 광주와 서대문형무소,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등 한국 민주화의 여정을 부지런히 쫓아 다녔다.

이 뿐이 아니다. 아직 버젓이 군사쿠데타가 일어나는 태국, 2년 전 정권교체에 성공한 스리랑카 등 민주주의 변방의 청년들에게 광주는 방한 시 반드시 들러야 할 역사의 현장이다. 짧은 시간, 희생을 통해 이뤄낸 정의의 가치는 서양의 그것보다 훨씬 가깝고, 생생하며 그 자체로 숭고해서다. 한국의 민중운동사를 연구해 온 해외학자 조지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저서 ‘한국의 민중봉기’에서 “20세기 말 아시아를 휩쓴 정치격변의 중심에 광주가 있다”고 단언했다. 그럼에도 “반만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군부독재를 제압하고 민주주의 쟁취”의 디딤돌이 된 풀뿌리 저항의 실체가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96세 나치 부역자의 수감을 결정한 독일의 과거사청산 작업은 부러워하면서 정작 남들은 닮고 싶어 하는 우리의 역사에는 얼마나 벅참을 느끼는가. 되레 지금도 오월 광주를 ‘사태’로 폄하하고 심지어 ‘폭동’으로 왜곡하려는 시도가 도처에 넘쳐난다. 광주의 열흘을 부르는 공식 명칭은 ‘5ㆍ18광주민주화운동’이다. 88년 4월 쿠데타 주역이 대통령일 때 일찌감치 정한 이름이다. “5ㆍ18 정신을 헌법 전문에 담겠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일성도 이런 자부심의 소산일 것이다.

지난해 촛불이 비폭력 투쟁의 상징으로 세계의 찬사를 받았듯, 80년 광주의 횃불은 자유와 존엄을 갈망하는 나라들에 수출해도 부족함이 없는 무형유산이다. 훗날 역사에서 80년대는 쿠데타 때문이 아니라 한국 민주주의를 일군 오월 광주 덕분에 더 큰 생명력을 지니리라 믿는다. 더 이상 비극을 되새김질만 해서는 안 된다. 아픈 역사도 자랑스러운 역사가 될 수 있다.

김이삭 국제부 기자 hir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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