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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소설가

등록 : 2016.01.08 14:28
수정 : 2016.01.10 10:59

[장정일 칼럼] 개신교 윤리가 과연 자본주의적인가

등록 : 2016.01.08 14:28
수정 : 2016.01.10 10:59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1920)은 프로테스탄트(개신교)의 특정 분파(칼뱅주의)가 가톨릭을 포함한 몇몇 다른 거대 종교보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데 더 호의적이었다고 논증한다.

그는 근면과 절약을 통해 축적된 재산을 신실한 신자의 표시이자 구원받은 증거라고 믿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세속적 금욕주의와 합리성으로 무장한 자본주의 정신 사이에 밀접한 친화력이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 윤리가 자본주의 정신의 다양한 요소 가운데 하나였다는 것을 입증하고자 했을 뿐, 칼뱅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일대일’ 인과 관계를 주장하지는 않았다는 반론도 있다. 하지만 이미 속화된 이론은 쉽사리 교정되기 힘들고, 그것을 내면화하면서 거기서 자긍심을 얻는 세력이 있다면 더욱 그렇다.

예수님이 설법하신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에서 거지(나사로)는 죽어서 천국으로 가고, 부자는 죽어서 지옥으로 간다. 활활 타오르는 불 속에서 고통을 당하던 부자는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것을 보고서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라고 간청한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매정하게 그 부탁을 거절한다.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누가복음 16장 14~31절).

이렇듯 성서는 ‘부자는 천국에 갈 수 없다’(마태복음 19장 23~24절)고 선언하며,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마태복음 5장3절)고 가르친다. 때문에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읽으며 느끼는 가장 압도적인 감정은 ‘감수성의 단절’이다. 성서는 ‘돈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악의 뿌리’(디모데 전서 6장10절)라고 분명히 말했거늘, 성서적 세계를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던 종교개혁기의 서유럽인이 어떻게 해서 부자가 되는 것을 신의 은총과 구원의 확약으로 여기게 되었을까?

베버의 책보다 6년 늦게 나온 R. H. 토니의 ‘기독교와 자본주의의 발흥’(한길사,2015)은 베버의 주장과 달리, “‘자본주의 정신’은 청교도주의의 산물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우선 지은이는 16, 17세기에 네덜란드와 영국이 보여준 자본주의 발전은 베버의 주장처럼 두 나라가 신교국가였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광범위한 경제혁명의 결과였다고 말한다. 그런 다음 지은이는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사이에는 애초에 아무런 친화력이 없었다고 말한다. 초기칼뱅주의와 후기칼뱅주의를 구분하는 지은이는, 초기칼뱅주의의 경제관은 종교개혁 이전의 중세적(성서적) 경제관과 하등 다르지 않았다고 말한다. 자본주의에 적대적이었던 칼뱅주의가 후기로 넘어가면서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게 된 것은, 종교가 항상 특정 시대의 권력이나 사회와 타협하며 적응해 왔기 때문이다.

1517년, 마르틴 루터가 교황 레오 10세의 면벌부(免罰符) 판매를 비판하는 ‘95개 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문에 내걸면서 종교개혁이 시작됐다. 하지만 영화로도 만들어 졌던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미하엘 콜하스’(창비, 2013)나, 토마스 뮌처가 일으킨 농민전쟁에서 루터가 했던 역할도 천년왕국적인 종교혁명을 탄압하고, 국가와 교권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베버는 사회 적응력이 종교의 생명이라는 것을 간과했기 때문에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과 같은 관념적인 책을 썼다.

‘기독교와 자본주의의 발흥’은 특정 종교가 자본주의적 변화를 불러 온 것(베버)이 아니라, 그 시대의 경제적 팽창이 성서적 경제관을 굴절 시켰다(토니)고 말한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두 책 가운데 베버가 승승장구하고 토니가 그늘에 가려진 것은, 어떤 설명은 채택되고 어떤 설명은 배제되는 시대정신과 토양이 있어서다. 탐욕스러운 자본가와 자본주의 친화적인 된 프로테스탄트나, 두 세계 사이에 높은 친화력이 있다고 믿는 것이 양쪽의 양심에 두루 유익했다. 그 결과 자본주의와 개신교는 대립물의 일치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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