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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불온한 시대, 순수라는 유령

입력
2016.08.05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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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들에 “순수함 증명하라” 강요

판관까지 자처하는 건 폭력일 뿐

언제까지 ‘불순’ 유령놀음 할 텐가

박근혜 대통령의 ‘사드 배치 지역 검토 가능성’ 발언 이후 새 후보지로 거론된 경북 성주군 염속산에 인접한 김천시 조마면에 5일 ‘사드 배치 반대’ 현수막이 내걸렸다. 사드 배치에 반대하는 성주 주민들을 ‘순수-불순’ 프레임으로 압박했던 정권은 또 누구를 향해 순수함을 증명하라 윽박지를까. 김천=추종호기자 choo@hankookilbo.com
박근혜 대통령의 ‘사드 배치 지역 검토 가능성’ 발언 이후 새 후보지로 거론된 경북 성주군 염속산에 인접한 김천시 조마면에 5일 ‘사드 배치 반대’ 현수막이 내걸렸다. 사드 배치에 반대하는 성주 주민들을 ‘순수-불순’ 프레임으로 압박했던 정권은 또 누구를 향해 순수함을 증명하라 윽박지를까. 김천=추종호기자 choo@hankookilbo.com

하나의 유령이 대한민국을 떠돌고 있다. ‘순수’ 혹은 그 짝패로서 ‘불순-외부세력’이란 유령이. 사회적 갈등의 현장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이 유령은, 정권을 비롯해 권력과 돈을 쥔 자들에 맞서려는 모든 이들에게 묻고 또 묻는다. “당신은 순수한 당사자인가”, 그리고 “당신의 의도는 순수한가”. 질문은 끈질기게, 때론 잔인하게 이어진다. “순수함을 스스로 증명하지 못한다면 당장 목소리를 빼앗고 말겠다”는 겁박과 함께.

군사독재 시절 횡행하던 ‘불순분자-제3자 개입 척결’의 망령은 보수정권 재집권과 함께 좀비처럼 되살아났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을 응원하는 ‘희망버스’ 행렬, 강정마을과 밀양을 향한 연대의 손길은 ‘외부세력’이란 이름으로 난자당했고, 피붙이를 잃은 세월호 유족들의 처절한 진실규명 요구는 끊임없이 ‘불순한 저의’를 추궁당하고 있다.

사드 배치에 반대하는 성주 주민들은 ‘순수한 당사자의 정당한 투쟁’임을 입증하기 위해 상경시위 때 파란 리본을 가슴에 달아야 했다. 정부의 재정지원에 목맨 대학 당국의 독주에 반기를 든 이화여대생들은 우월의식과 기득권을 상징하는 ‘이대 나온 여자’ 프레임까지 버무려진 부당한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서울시의 청년수당 지급에는 직권취소 철퇴와 함께 박원순 시장의 ‘대권 행보를 위한 불순한 정책’이란 딱지가 덧씌워졌다. 시절은 불온하기 짝이 없는데, 도처에서 ‘순수의 시대’ 찬가가 울려 퍼지는 형국이다.

대체 뭣이 순수인가. 표준국어대사전을 펼쳐 보자. 순수(純粹)= ①전혀 다른 것의 섞임이 없음. ②사사로운 욕심이나 못된 생각이 없음. 첫 용례로 ‘순수 성분/순수 결정체/…인간의 손에 닿는 모든 것은 그 순수가 파괴되기 마련이다’ 등을 든 걸 보면 ①은 자연ㆍ물질계의 ‘순도 100% 상태’를 칭하는 것으로 보아야 마땅하다. 따라서 사람 혹은 의도, 싸움 같은 개념어와 묶어 쓸 땐 ②가 적절하다. 문제는 뜻풀이의 핵심을 이루는 ‘사사로운’이나 ‘못된’이란 말이 주관적 가치판단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 어휘라는 점이다.

결론은 자명하다. 순수의 절대적 기준이란 없다. 그러니 스스로의 순수함을 ‘의심할 바 없이 증명’한다거나, 누군가의 순수함을 ‘객관적으로 판단’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게 가능하다는 주장이야말로 ‘순도 100%의 생떼’이고, 권력과 돈을 쥔 자가 순수함의 증명을 강요하거나 어설픈 판관을 자처하는 것이야말로 ‘순도 100%의 폭력’이다.

싸워 본 사람은 안다. ‘순수 대 불순’ 프레임이 노리는 건 싸우는 이들의 두려움과 분열을 부추겨 스스로 무릎 꺾게 하는 것임을. 한국일보 기자들이 부패한 옛 사주와 맞서 싸울 때 그 비호세력이 무기로 삼았던 것도 ‘극소수 불순한 기자들의 선동’이란 공격이었다. 허무맹랑한 얘기였지만, 행여 우리의 ‘순수한 싸움’이 곡해되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대 본관을 점거한 학생들이 느꼈을 두려움을 알기에, ‘외부세력’의 연대를 거부하고 스스로 뽑은 총학생회마저 멀리하는 걸 지켜보면서 몹시 안쓰러웠다.

어김없이 순수를 들먹이며 대화를 거부하던 대학 당국이 결국 백기를 들었다. 순수하게, 그리고 영리하게 잘 싸운 학생들이 이겼다. 하지만 마음 한편을 묵직하게 누르는 착잡함을 지울 수 없다. 여느 투쟁의 현장에서는 재현하기 어려운 이 새로운 싸움의 방식과 결과물이 혹여 ‘순수-불순’ 프레임을 더 공고히 하는 데 악용되지 않을까 우려되는 탓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느닷없는 ‘사드 배치 지역 재고 가능성’ 발언으로 성주에 다시 눈길이 쏠리고 있다. TK 민심을 달래 볼 요량으로 내부조율도 없이 툭 던진 말로 드러났다. 당초 “철저한 검토 끝에 최적의 부지를 결정했다”던 정부는 자가당착에 빠졌다. 새 후보지로 거론되는 성주 내 여러 지역 주민들이 들썩이고 인접한 김천에도 사드 배치 반대 플래카드가 내걸렸다. 정부와 여당, 보수 언론은 또 누구를 향해 외부세력과 선을 긋고 순수를 증명하라 윽박지를 텐가.

이희정 디지털부문장 jaylee@hankookilbo.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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