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정민승 기자

등록 : 2017.06.21 18:00
수정 : 2017.07.04 15:09

[짜오! 베트남] 베스트셀러에 신경숙ㆍ혜민스님…봇물 터진 문학 한류

<15> 한국 문학 열풍

등록 : 2017.06.21 18:00
수정 : 2017.07.04 15:09

수교 25주년 기념 사업 일환

고전ㆍ우화까지 엮은 6권 번역서

독자 몰리고 언론들 취재 경쟁

호찌민 시내 책의 거리에 자리잡은 한 서점 직원들이 베트남어로 번역 출간된 한국 책을 들어 보이고 있다. 왼쪽 직원이 든 책은 공지영의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오른쪽이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베트남판이다.

지난 17일 호찌민시 ‘책의 거리(Nguyen Van Binh)’에서는 베트남에서 보기 드문 출판 기념회가 열렸다.

100명 이상이 행사장을 찾은 것도 이례적이었지만, 현지 언론들의 불꽃 튀는 취재 경쟁도 눈길을 끌었다. 특히 한 TV방송은 아나운서까지 보내 현장에서 관계자들을 취재해 보도하기도 했다. 기념회 행사 관계자는 “베트남에서 책 출판 기념회 행사가 TV에 방영되는 경우는 없었다”고 말했다.

특히 플래시 세례가 집중된 건 모두 6권으로 구성된 ‘한국문학 시리즈.’ 한국-베트남 수교 25주년 기념 사업 일환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지원을 받아 제작된 번역서다. 한국문학 교재와 한국구비문학선집, 고전문학선집, 한국우화 등으로 꾸려졌다. 이 시리즈 출간 주역인 판 티 뚜 히엔 호찌민 인문사회과학대 한국학부 학장은 “호찌민방송이 ‘이번 주에 읽어야 할 책’ 리스트에 올려 놓고 있는 것을 비롯해 거의 모든 언론이 문예코너 핫 이슈로 소개하고 있다”며 “베트남 내 한국문학에 대한 인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시리즈는 연구진 26명이 ‘춘향전’, ‘낙랑공주 이야기’ 등 한국 고전문학작품 수십 편을 번역한 것으로, 이렇게 많은 한국 작품이 동시에 베트남에 소개된 일은 처음이다.

지난 17일호찌민 응우옌 반 빈 거리에서 열린 '한국문학 시리즈' 출간 기념회에서 티 뚜 히엔(왼쪽 여섯 번째) 호찌민 인문사회과학대 한국학부 학장등 관계자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신호탄은 ‘엄마를 부탁해’

20일 오후 다시 찾은 응우옌 반 빈, 책의 거리. “한국 책을 찾고 있다”는 요청에 대부분의 서점 직원들은 주저 없이 책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신경숙 ‘엄마를 부탁해’, 김영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천명관 ‘고령화 가족’, 공지영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등 소설 번역서들이, 아주 눈에 띄는 자리는 아니었지만 중국과 일본 서적들과 함께 나란히 진열돼 있었다. 직원 안 꽌(26)씨는 “모두 꾸준히 팔리는 책들이지만 요즘 가장 인기 있는 책은 혜민 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며 별도로 마련된 베스트셀러 코너를 가리켰다. 그는 “우리 서점에서만 하루 100권 이상 팔리는 책”이라며 “베트남에 와 절을 하나 세워도 될 정도로 혜민 스님은 유명 인사”라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제목에 끌려 혜민 스님 책을 구입했다”는 은행원 탄 떵 쨘(27)씨는 “빠르게 변하는, 베트남의 고속 성장에 피로를 느끼는 직장인들에게 호소력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최근 베트남에는 지식인들과 고소득층 직장인들을 중심으로 내면을 성찰하게 하는 이른바 힐링 서적들이 유행하고 있다.

짠 띠엔 까오 당 냐남출판사 부사장이 호찌민 시내 한 북카페에서 신경숙 작가의 책을 들고 한국 문학 작품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그는 “어렵지 않으면서도 울림을 주는 신경숙 작가의 문체가 가장 마음에 든다”고 했다.

베트남에서 한국 작품들이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현지 출판업계에 따르면 외국 문학으로는 중국과 일본 작품이 주를 이루고 한국 작품들은 큰 두각을 보이지 못했다. 그러다가 2010년 즈음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짠 띠엔 까오 당(52) 냐남 출판사 부사장은 “사실 베트남 내 한국 문학에 대한 전망은 어두웠다”며 “하지만 가족 이야기를 담은 신경숙 작품이 대중화하면서 이제는 한국도서 코너를 따로 만들고 있는 곳도 있을 정도”라고 전했다. 지난해 맨부커 수상작인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이미 번역돼 있었지만, 수상 소식이 알려지면서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베트남에서 가장 많은 한국 작품을 번역ㆍ출간하고 있는 냐남 출판사는 2009년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출간 이후 한국 작품 출간을 확대하고 있다. 2013년 김영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와 아동문학 작품 등 4권을 출간했고, 2015년에는 안도현, 공지영의 소설 등 8권을 펴냈다. 지난해에는 신경숙, 김난도 등 10개 작품을 베트남어로 번역했다. 이 같은 활발한 한국 서적 출간에 힘입어 2012년 30종에 그치던 한국 작품 번역서는 지난해 80종 수준으로 늘어난 것으로 업계는 추정하고 있다.

베트남의 한 인터넷서점에서 판매되고 있는 한국 책들. 베트남이 한국으로 경제성장을 모델로 삼고 있는 덕에 기업인들의 자서전도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다. 오른쪽 아래가 지난해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혜민 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베트남판. 푸엉남인터넷서점 캡쳐

정주영, 박태준 등 한국기업인 자서전도 인기

중국이나 일본에 비하면 아직 미미한 수준이지만, 업계는 한국 도서의 빠른 성장에 주목하고 있다. 최근에는 다양한 작가들이 소개되고 있는 동시에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이 소개되고 있는 점도 특징이다. 냐남 출판에서 한중일 도서 편집을 맡고 있는 따 흐엉 니(32) 편집장은 “기존에는 신경숙 소설과 같은 가족주의 작품을 주로 번역했지만 최근엔 황선미의 ‘마당을 나온 암탉’등 아동문학 작품에도 손을 대는 등 장르를 확장하고 있다”며 “여기에 편혜영, 한강, 이정명 등 대중적이면서도 문학적 완성도가 높은 작품들에도 관심을 쏟고 있다”고 전했다.

한국 경제 성장 주역들의 이야기를 다룬 책들도 인기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자서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를 비롯해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회고록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일대기를 다룬 ‘철의 사나이’, 현대건설 사장을 지낸 이명박 전 대통령의 자서전 ‘신화는 없다’ 등이 스테디셀러로 분류된다. 또 다른 서점 점원 쨘 디 아 니(25)는 “베트남이 한국의 경제성장을 모델로 하고 있는 만큼 이들의 자서전도 인기를 끌고 있다”면서 “베트남 사람들이 한국 기업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고 전했다.

짠 띠엔 까오 당 냐남 출판사 부사장은 “한국의 문학 작품들이 베트남에서 또 다른 한류를 일으키지 말라는 법이 없다”며 “보다 다양한 분야의 서적 출간을 위해 새로운 번역작가 모집 공고도 내놓는 등 한국 서적 번역에 주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호찌민=글ㆍ사진 정민승 특파원 msj@hankookilbo.co

호찌민 책의 거리에 자리잡은 한 서점에서 한 손님이 베스트셀러 코너에 있는 혜민 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보고 있다. 이 책은 이 서점에서 하루에 100권 이상 팔리는 '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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