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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충성과 반성

입력
2017.01.24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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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라고 해서 승승장구만 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5공 시절 한때나마 찬밥 신세였던 적이 있다. 당시 허화평 대통령 보좌관이 그를 검찰 승진 인사에서 탈락시켜 옷을 벗기려 했다. 그러자 위기감을 느낀 김기춘이 허 보좌관 앞으로 장문의 편지를 썼다. 편지 전달자는 검찰 후배인 박철언 정무비서관이었다. 결국 김기춘은 검사장으로 승진했고 검찰을 떠나지도 않았다. 박철언에 따르면 편지는 충성을 맹세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김기춘에게 충성은 생존과 모색의 방편이었던 셈이다.

▦ 김기춘 전 비서실장은 주군(主君)이나 하명(下命) 같은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고 이혜훈 의원이 증언한 바 있다. 주군은 군주국가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최고통치자 즉 임금을 말하고 하명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내리는 명령을 뜻한다. 소설이나 영화 같은 역사물에서야 얼마든 사용할 수 있지만,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국민이 지도자를 선출하는 현대 민주공화국에서 대통령의 권위를 높이겠다며 이런 말을 쓰는 것은 난센스다. 결국 김 전 실장의 충성이라는 게 왕정국가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뜻밖에 되지 않는다.

▦ 문제는 김 전 실장뿐 아니라 정치인과 공무원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충성하겠다며 경쟁까지 했다는 점이다. 대통령의 뜻이라며 이미경 CJ 부회장의 사퇴를 압박한 조원동 전 청와대 경제수석조차 “청와대에서 단추를 누르면 밑으로 내려가면서 충성경쟁을 하려고 일파만파가 된다”고 지적했을 정도다. 지난해 말 국회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김남근 변호사가 “행정조직 내부의 충성문화를 척결하고 건전한 비판과 견제를 통한 합리적 문화를 정착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이런 문화를 비판한 것이다.

▦ 그러나 충성 경쟁에 눈이 멀어 잘못을 저지른 인사들이 나중에라도 반성하고 사과하는 일은 드물다. 김기춘 전 실장은 쏟아지는 증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블랙리스트에 대해 모른다고 잡아뗀다. 그러니 반성도, 사과도 할 이유가 없다. 그가 하지 않은 사과는 결국 문화체육관광부가 했다. “너무나 참담하고 부끄럽다”며 머리를 조아렸지만 도리어 영혼 없는 사과, 알맹이 없는 사과라는 소리가 나오고 있다. 국민이 듣고 싶은 것은 형식적 반성, 마지 못해 하는 사과가 아니라 맹목적 충성은 더 이상 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박광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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