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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키운 8할은] 프랑스에선 볼 수 없는 불란서 주택... 1970년대 도시생활 여유 상징

입력
2017.12.02 04:40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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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대한민국 농촌에 새마을주택이 있었다면 도시에는 불란서 주택이 있었다. 각도가 다른 박공지붕을 전면에 놓고 발코니, 테라스를 가진 집에는 침실과 거실, 입식 부엌과 실내 욕실이 들어섰다. 지하나 반지하에 보일러실이 들어앉고 ‘미니 2층’식으로 다락이 보편화됐다. 불란서 주택은 이름과 달리 프랑스에선 찾아볼 수 없는 양식이다. 영국과 프랑스가 제국주의를 이끌던 19세기 인도와 아프리카, 인도차이나 반도 등에서 유행하던 식민지 주택 양식이 한국에 상륙해 불란서 주택으로 불렸다고 추정된다(서윤영 ‘꿈의 집, 현실의 집’).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불란서 주택의 주인들은 가수 남진의 히트곡 ‘님과 함께’를 현현하려는 듯, 앞마당을 푸른 잔디로 덮고 담장을 높이 둘러 위에는 병조각과 쇳조각을 박았다. 불란서 주택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도시 주택가에서 전통적 의미의 공동체 문화는 작동하지 않게 됐고 도시 생활의 여유를 상징했던 불란서 주택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오랜 기억을 지우고 아름다운 풍경을 무너뜨린 주범이 됐다.

작가들은 불란서 주택이 상징하는 이 복잡다단한 풍경을 종종 소설로 변주했다. 김원일은 자전소설 ‘마당 깊은 집’에서 불란서 주택이 지어지는 장면을 이렇게 썼다. ‘4월 하순 어느 날, 나는 마당 깊은 집의 그 깊은 안마당을 화물 트럭에 싣고 온 새 흙으로 채우는 공사 현장을 목격했다. 내 대구생활의 첫 일년이 저렇게 묻히고 마는구나 하고 나는 슬픔 가득 찬 마음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굶주림과 설움이 그렇게 묻혀 내 눈에 자취를 남기지 않게 된 게 달가웠으나, 곧 이층 양옥집이 초라한 내 생활의 발자취를 딛듯 그 땅에 우뚝 서게 될 것이다.’

이기호 역시 여러 작품에서 불란서 주택을 등장시켰다. 2014년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인 ‘차남들의 세계사’의 주인공 나복만은 “오로지 자신의 택시 운전과, 김순희와, 불란서풍 주택의 네 평짜리 단칸방만을 지키고자 애썼던 사람”으로 설정했다. 자전소설 ‘원주 통신’에서 박경리 선생이 이기호 작가의 고향 원주를 찾던 해를 “우리 동네에 불란서 풍 신형주택 열다섯 채가 처음으로 완성된 해”로 소개했다.

이윤주 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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