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 후임에 진보파 지명하면보수5 진보4 판도 오랜만에 역전
총기, 낙태 등 이슈 판세 바뀔 수도
9명의 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 가운데 대표적인 보수 인사로 꼽히는 앤터닌 스캘리아 대법관이 13일(현지시간) 새벽 79세를 일기로 갑작스럽게 별세했다. 이에 따라 ‘보수 5 대 진보 4’로 보수 우위를 유지해온 미 사법부의 이념 지형이 격변을 피할 수 없게 됐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보수 인사를 선택할 이유가 없다는 관측이 우세한 가운데 미 사법계는 오랜만에 진보진영 우위의 판도가 펼쳐질 전망이다.
뉴욕타임스(NYT)와 워싱턴포스트(WP) 등 미 언론들은 “스캘리아 대법관의 사망이 미국 정계를 격랑으로 몰아갔다”며 일제히 정치적 파장에 무게를 둬 보도했다. 당장 11월 대선을 앞둔 미국 정가는 임기를 불과 1년 여 남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종신직인 스캘리아 대법관의 후임을 지명하는 게 타당한지를 놓고 격론에 돌입했다. 특히 지난해 동성결혼 허용 결정 이후 대법원에는 총기규제나 낙태, 오바마 케어 등 미국의 이념지형을 판가름하는 이슈들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어 민주ㆍ공화 양당은 한치 양보없는 싸움을 벌일 태세다.
경찰에 따르면 스캘리아 대법관은 전날 텍사스 주 말파 인근 대형 리조트에서 지인 40여명과 파티를 가진 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가 이날 아침 숨진 채로 발견됐다. 그가 아침 식사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리조트 관리인과 현장에 있던 신부, 의료진이 문을 따고 들어가 사망을 확인했다고 경찰 관계자는 전했다. WP는 “자연사가 아니라고 의심할 징후는 없다”고 보도했다.
미 언론들은 1986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임명으로 대법관에 취임한 후 30년간 동성애 결혼반대 등 일관되게 보수적 판결을 해온 스캘리아 대법관의 죽음과 생애를 심도 있게 다루면서도 사법권의 이념 지형 변화에 민감한 백악관과 정계의 표정도 집중적으로 전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심야에 발표한 성명을 통해 스캘리아 대법관을 추모한 후 “후임자를 지명해 헌법상 주어진 책임을 완수할 것”이라며 빠른 지명절차 진행을 못 박았다.
하지만 정가에서는 후임 인선 절차를 두고 공방이 벌어졌다. 민주당의 해리 리드 상원 원내대표가 “수많은 안건이 연방대법원에 쌓여있는 만큼 상원은 책임감을 갖고 최대한 빨리 공석을 채워야 한다”면서 오바마 대통령보다 앞서 입장을 발표했다. 미 대법관은 대통령 지명 후 상원 승인을 통해 최종적으로 임명되는 절차를 밟기 때문에 상원 다수당인 공화당이 이를 대선 이후로 지연할 것을 염두에 두고 선수를 친 것이다. 그러자 공화당의 미치 맥코널 상원 원내대표는 곧바로 “국민이 차기 대법관을 결정하는 데 의견을 더해야 한다”며 투표를 거치는 새 대통령에게 지명 절차를 맡겨야 한다고 응수했다.
앞서 진보 성향의 소니아 소토마요르, 엘리나 케이건 등 2명의 대법관을 지명했던 오바마 대통령이 예정대로 지명절차를 진행할 경우, 오바마 정부는 미 역사상 가장 많은 대법관(3명)의 인사권을 행사하게 된다.
후임자로는 유연한 진보 성향의 젊은 법관인 인도계 스리 스리니바산(49) 연방항소법원 판사가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유에스에이(USA)투데이 등은 “동성결혼에 대해 찬성하면서도 총기소유자유의 바탕이 되는 수정헌법 2조의 유지를 지지하는 스리니바산 판사는 민주ㆍ공화 양당이 모두 수긍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보도했다.
양홍주기자 yangh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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