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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소외된 당신은 촛불인가 태극기인가

입력
2017.02.15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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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들 태극기집회 참가는 인정투쟁

한국 노인빈곤율 OECD 압도적 1위

박근혜정부는 노인 문제에 관심 적어

3년 전 개봉한 ‘국제시장’은 매우 특이한 영화였다. 정치인의 집단 관람과 보수언론의 밀어 주기, 박근혜 대통령의 노골적 칭찬 같은 영화 외적인 일이야 그렇다 쳐도, 제 입으로 “고생 참 많이 했다”며 자신의 노고를 낯뜨겁게 공치사하는 주인공은 그 전까지 보기 힘든 캐릭터였다. 사는 게 힘들어도 묵묵히 자신을 희생하되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는 게 한국의 부모상이지만 ‘국제시장’의 주인공은 이와 달리 자신을 한껏 드러내며 공로를 인정받으려 했다. ‘변호인’ 같은 영화로 박 대통령의 노여움을 받은 CJ가 미움을 만회하기 위해 ‘국제시장’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다면 주인공의 캐릭터는 지금도 논란일 가능성이 있다.

세월이 흐르면 서서히 잊혀지는 자연스러운 섭리를 거부한 채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 달라는 ‘국제시장’의 주인공 같은 사람들을 서울시청 광장에서 만날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막겠다며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계엄령 발동 같은 과격 주장을 하는 노인들이 많다. 태극기 집회 현장에서 노인들을 만난 생애 구술사 작가 최현숙씨는 이들의 외침을 인정투쟁으로 본다. 인정투쟁이란 남들로부터 자신의 가치나 능력을 인정받기 위한 투쟁을 말한다. 삶이 만족스럽다면 그럴 필요가 적을 테니 이들이 인정투쟁에 집착하는 것은 사는 게 고통스럽고 고단하기 때문일 것이다. 최현숙씨가 한겨레신문에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공간적으로 노인들은 배제되고 내몰려 왔다”고 말한 것도 그런 이유로 짐작된다.

최씨의 증언이 아니라도 한국 노인의 삶은 매우 힘겹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2015년 한국의 노인빈곤율은 49.6%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압도적 1위다. 통계청과 한국은행 등이 함께 낸 자료에는 이 비율이 61.7%나 된다. 노인자살률은 OECD 평균의 4배여서 독일이나 프랑스의 할아버지 1명이 자살할 때 4명이 목숨을 끊는 꼴이다. 부모 세대를 부양했지만 자식 세대의 부양을 받지 못하니 아파트 경비나 청소 일만 할 수 있어도 감지덕지다. 길거리에서 폐지를 주워 생계를 잇는 노인도 많다. 그래서 미국의 유력 일간지 워싱턴포스트는 서울에서 노인들이 몇 천원을 벌기 위해 폐지를 줍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는 기사를 이미 3년 전에 실은 적이 있다.

직무 정지 상태에서 탄핵 심판을 기다리는 박근혜는 누구보다 노인층의 지지를 많이 받아 대통령이 됐다. 일흔넷의 김기춘을 비서실장에, 일흔다섯의 이병호를 국정원장에 앉혀 역대 최고령 기록을 갈아치우는 등 일흔 넘은 인사들을 중요 자리에 줄줄이 앉혔다.

그러나 그렇게 노인들의 환심을 샀을지는 모르겠으나 고단한 그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실질적 노력을 한 흔적은 많지 않다. 65세 이상 모두에게 월 20만원씩 기초연금을 지급하겠다는 대선 공약을 내걸었지만 막상 당선이 된 뒤에는 하위 70%에게만 그것도 20만원 전액이 아니라 차등해서 지급하기로 정책을 바꿨다. 물론 재원 조달에 문제가 있을 테지만 법인세 등 깎아준 세금의 원상 회복 같은 노력은 하지 않은 채 기초연금 지급액만 축소한 것은 노인정책을 우선 순위의 뒤로 밀었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노인을 위한 좋은 일자리 마련이나 노인장기요양보험의 혜택을 넓히려는 노력도 별로 없었다.

그러는 사이 노인빈곤율은 꾸준히 치솟았다. 삶의 형편이 5년 단임 대통령의 의지와 능력에 따라 전적으로 결정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해도 이렇게 노인빈곤이 심각해지는 것은 박근혜정부의 의지와 능력을 의심하게 만든다. 박근혜는 과연 최순실 챙기기나 교과서 국정화의 절반만큼이라도 노인들의 고단함을 덜어 주는데 관심을 기울였는지 따지고 싶다.

사정이 이런데도 토요일이면 서울시청 광장에서 박근혜 탄핵을 막겠다며 태극기를 흔드는 노인들이 많다. 박근혜정부 들어 살기가 좋고 행복해졌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이다. 사는 게 힘들고 소외됐다고 느낀다면 태극기와 촛불 중 무엇을 들어야 하겠는가.

박광희 논설위원 kh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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