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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말하기의 전장

입력
2018.05.27 09:57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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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강연 요청이 온다. 새삼스럽게 늘 이상하다. 나는 본디 환자를 보거나 글을 쓰려는 마음뿐이었고, 눌변에다가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두려워했으며, 재능 없는 일은 피하는 성격이었다.

그러던 재작년 첫 강연에 나섰다. 열심히 하면 되겠지,라는 단순한 마음가짐은 한 직업 세계를 간과한 것임을 곧 알게 되었다. 몇 백 명의 사람 앞에 서자 즉시 시야가 좁아지고 부모님이 뵙고 싶어졌으며 말은 어불성설이었다. 돌이키면 순전히 경험 부족이었다. 그 어설픈 시간을 참아준 사람들을 뒤로하고, 어느덧 나는 꽤 많은 강연을 그럭저럭 소화하고 있다. 본디 성정과 재능을 두고 비견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내용은 매우 다양하다. 의사 본업이나, 나라는 개인이나, 작가, 독서, 글쓰기나, 인권, 아동 학대, 건강 상식까지 있다. 그 자리에 알맞은 주제를 이야기하는 사람의 필요를 거꾸로 느낀다. 요청을 받으면 거절하기는 어렵다. 아직 만나보지 못한 그 청자들이 시간을 내준다는 사실이 미리 감사해지기도 하고, 이미 담당자가 기획이라는 자신의 업에서 나라는 사람으로 그림을 완성한 일이라 가서 숟가락만 얹으면 되는 일이 미안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게 나는 꿈에도 없고 재주도 없던 ‘말하기’에 대해서 꽤나 고찰하게 되었다. 분명 나는 천성적인 말주변이 워낙 부족한 사람이므로, 같은 내용을 글쓰기로 전달하는 편이 조금이나마 낫다. 하지만 세상엔 현장에서 듣고 소통하며 시간을 보내는 자리가 필요하다. 게다가 진정을 담은 말은 진정을 담은 글처럼 힘이 있다. 그 세상 일의 일부를 내가 맡은 셈이다.

강연을 잘 하는 첫 번째 방법은 많이 해보는 것이다. 그것보다 더 좋은 왕도는 따로 없다. 일단 주어진 시간에 준비한 분량의 이야기를 기획해서 소화해 본다. 다음에 말할 당시의 느낌과 청중의 반응을 떠올리고 개선해서 반복하면 조금이라도 더 좋은 강연이 된다. 강연에 숙달된 사람들은 내용을 떠나 자신만의 논리나 전달 방식이 명확하고 청중이 느낄 감정의 포인트가 정확하다. 결국 경험이 좋은 전달자를 만든다.

그 다음으로는 생각하는 것이다. 강연은 정해진 시간 동안 옴니버스식으로 이어지는 통일된 이야기다. 주제를 받으면 며칠 전부터 일상생활에서도 그 흐름을 생각한다. 이어가면 점점 세부적인 그림이 그려진다. 마지막으로 가장 최적으로 시각화할 수 있는 자료 작업을 하고, 시뮬레이션을 해서 마무리한다. 생각의 회로를 강연 쪽에 많이 돌릴수록 더 좋은 강연이 되기에, 짧은 강연이어도 품은 제법 많이 든다. 새로 구성하는 내용이라면 시간도 더 필요하다. 이 와중에 시각 자료도 계속 개선되고 발전한다.

말을 하다 보면 먼저 했던 말일수록 더 잘 전달하게 된다. 하지만 글로 써냈던 내용이라면 한번 말해본 것처럼 수월하다. 글쓰기의 장점이다. 한 편의 글을 쓰려면 그 내용을 적어도 하루 이상 곱씹어야 한다. 이는 생각의 회로를 충분히 돌려 결론을 맺은 것이므로, 말하기는 수월하고 내용은 분명하며 감정은 명확히 전달된다. 결국 강연은 생각을 많이 끌어낼수록 좋아진다는 점에서 글을 쓰는 과정과 비슷하고, 강연 하나를 마치면 한 번만 재생되는 글 한편을 마친 느낌이다.

누군가 귀한 시간을 내어주고, 그 시선을 받는 자리에 서는 삶은 행운이다. 게다가 나 스스로 이야기를 기획해 만들어내고 사람들의 마음을 가늠하는 일의 주도권은 온전히 내 것이다. 작가가 전지전능한 위치를 갖는 글쓰기와도 비슷하다. 결국은 나 혼자서 벌이는 싸움이다. 나아지는 것도, 퇴보하는 것도, 후회하는 것도, 노력하는 것도 전부 나다. 나 스스로를 다그쳐서 나아질 수 있는 일 중에서 나쁜 것은 없다. 나는 또 하나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를 찾은 셈이다.

남궁인 응급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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