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삶과 문화] 또 봄을 낭비하고 말았어요

입력
2016.05.22 09:25
0 0

5월이 끝나려면 아직 열흘이 넘게 남았는데 서울의 수은주가 33도까지 올라가고 폭염주의보가 내려졌다. 자외선과 오존을 주의하라는 예보도 들린다. 반팔을 입고 출근해서 점심엔 냉면을 먹고 아이스커피를 마셨다. 사무실까지 잠깐을 걸었는데도 땀이 흘러서 에어컨을 켰다. 예년보다 두 달이나 빨리 찾아온 더위란다. 더위에 밀려 짧은 봄날이 속절없이 지고 있다. 봄이 가버린 아쉬움이 예전에 보았던 TV 광고의 카피를 생각나게 했다.

여성 내레이션) 자주 ‘다음에 다시 태어나면…’ 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다음에 다시 태어날 예정이 없어요.

최초이고 최후를 살고 있다.

어스 뮤직 앤 에코로지.

자막) 내일 뭘 입고 살아가지?

어스 뮤직 앤 에콜로지(earth, music and ecology)라는 일본 여성 캐주얼 브랜드의 TV 광고 카피다. 보는 순간 ‘맞아 나도 다시 태어날 예정이 없는데’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청순한 모델이 인생은 오직 한 번뿐이니 ‘최초이고 최후를’ 살아가고 있다는 심오한 얘기를 천연스럽게 하는 모습이 참 깜찍했다. 반팔 라운드 셔츠 하나에 2만원쯤 하는 중저가 브랜드가 다소 무거운 얘기를 무겁지 않게 광고에 담아낸 것이 신선했다.

광고는 일본의 유명한 영화배우 미야자키 아오이가 바닷가에서 통나무를 톱으로 자르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어느새 모닥불이 피워지고, 두 명의 미야자키 아오이가 나무에 걸터앉아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다. 물론 광고적인 장치도 잊지 않았다. 두 소녀는 머리 모양과 옷이 다르다. 한 가지 옷을 두 가지 방법으로 입을 수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설정이다. 톱질을 하다가 자연스럽게 옷을 앞으로 끌어내려서 조끼가 원피스로 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마지막 자막이 촌철살인이다. 네 인생 최초인 내일, 어쩌면 최후인 내일에 어떤 옷을 입을 거냐고 묻는다. 옷장 앞에서 한 번 더 망설이게 만드는 자막이다. 장사하는 것 같지 않게 장사를 하고 있다. 이 광고를 만든 카피라이터, 아마 철학자일지도 모르겠다.

5월엔 곱고 여리고 싱그러운 것들이 천지에 가득하다. 들판에 산에 길가에 쏟아지는 붉고 희고 노란 꽃무리, 허공까지 물들이는 낭창낭창 어린 연둣빛, 길모퉁이를 돌아설 때 예고도 없이 훅 끼쳐오는 라일락이나 아카시아 향기, 백도복숭아만큼 희디흰 아가들의 발뒤꿈치, 손깍지 끼고 팔랑거리며 걷는 젊은 연인들, 유행 지난 양복저고리에 일주일 넘게 매달려 있는 의기양양 카네이션…. 보기만 해도 마음이 환해져서 붙잡아 두고 싶은데 대개는 ‘다음’이라는 기약이 없는 것들, 다시는 같은 모습으로 만날 수 없는 것들이다. 알면서도 내일이면 금세 다시 만날 것 같아 안심하고 작별한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 흔들며 멀어진다.

마치 영원을 살 것처럼 또 한 번의 봄을 흘러 보내고 있다. 다음에 다시 태어날 것처럼 5월을 낭비하고 있다. 그렇다고 의기소침할 필요는 없다. 어스 뮤직 앤 에코로지의 다른 광고는 이런 카피로 봄을 잃고 허전한 마음을 위로해준다.

여성 내레이션) 세계는 지금 이 순간도 계속 파괴돼 간다.

나도 당신도 계속 파괴돼 간다.

하지만 동시에 지금 이 순간,

계속 다시 태어나고 있다.

스스로 쓴 광고에도 툭하면 혹하는 카피라이터답게, 이 봄이 가도 나는 매일 다시 태어날 것이다. 그리고 잊지 않을 것이다. 앞뒤 재지 않고 피어나는 꽃송이들의 무조건과 새 잎을 내기 위해 뿌리부터 힘을 모으는 가로수들의 몰입을. 풀이파리 하나까지 애써서 보여준 작은 희망과 가냘픈 노력을. 어쩌면 봄이 모두 내 것인 양 무조건 뜨겁게 몰입해서! 흥청망청 쓰는 것이 단 한 번뿐인 봄날을 가장 알차게 보내는 방법인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봄날은 가는데 내일은 뭘 입고 살아가지? 어디 할인매장에라도 가봐야 할까 보다.

정이숙 카피라이터ㆍ(주)프랜티브 이사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