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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아들 같아서, 딸 같아서… 술 권하는 사회

입력
2017.08.10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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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관병 갑질 파문으로 국방부 검찰단에 소환된 박찬주 대장의 부인 전모씨가 지난 7일 출석하고 있다. 파렴치 범죄에 빠지지 않는 레퍼토리 "아들 같아서"를 되풀이했다. 연합뉴스
공관병 갑질 파문으로 국방부 검찰단에 소환된 박찬주 대장의 부인 전모씨가 지난 7일 출석하고 있다. 파렴치 범죄에 빠지지 않는 레퍼토리 "아들 같아서"를 되풀이했다. 연합뉴스

아니나 다를까. 인터넷을 여니 패러디 만발이다. 박찬주 대장 부부의 공관병 갑질 파문 얘기다. “아들 같은 마음으로 대했다”는 해명이 기름을 끼얹었다. 러시아 한국대사관 성추행 사건에서 여대생에게 “대견해서 키스했다”는 항변이 나왔단다. “아들 같으니 학대하고, 딸 같으니 성추행 하냐”는 분노들이 넘쳐난다. ‘가족은 아니지만 가족 같은 관계’를 핑계삼은 유구한 갑질 역사를 총정리한 온라인 기사들도 줄줄이 등장한다.

한국은 ‘끈끈함’을 강조하는 형님ㆍ동생들로 가득 찬 유사가족 집단이란 지적은 새롭지 않다. 이런 집단에, 직위ㆍ직급은 있을지언정 인격적으로 동등한 존재들간의 공존을 상정하는 근대적 의미의 ‘사회’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이 점이 분명하게 드러난 건 아마 2012년 출간된 재독철학자 한병철의 책 ‘피로사회’의 인기 이후였을 게다. 이 책은 노동에 ‘쩔은’ 현대인의 삶, 번아웃 신드롬(Burn-out Syndrome)을 정면으로 다뤄 독일에서도, 우리나라에서도 화제를 모았다. 묘한 종교적 분위기 때문에 ‘분노의 힘’을 중시하는 이들에게 적잖게 욕도 먹었다.

그럼에도 우리가 너무 많은 일을 하고 있다는 메시지는 큰 공감을 끌어냈고, 정말 더 쉬자는 공감대가, 아니 공감대’만’이라도 확산됐으니 꽤 쏠쏠한 공을 세운 책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가 지금 피로하다는 직관적 작명 하나만 해도 충분히 통쾌했다.

그 통쾌함 덕에 이후 출판계는 한동안 ‘XX사회’라는 제목의 책들을 쏟아냈다. 대충 기억으로 더듬어봐도 팔꿈치사회, 허기사회, 과로사회, 잉여사회, 절벽사회, 격차사회, 부품사회, 단속사회, 투명사회, 분노사회, 감성사회 등이 줄줄이 이어진다.

재미있는 건 정작 이런 책들 제목에 왜 ‘사회’가 붙느냐다. 이런 책들이 주장하는 바는, 이사회가 망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팔꿈치 사회는 정교한 사회공학을 제안하는 넛지(Nudge)와 무관하다. 경쟁을 내면화한 우리가 서로를 팔꿈치로 쿡쿡 찔러대는 통에 우리 사회가 망했다고 주장하는 책이다. 허기사회는 정신적 빈곤에서 오는 무기력증 때문에 우리 사회가 망했다고 주장한다. 붕어빵에 붕어가 없듯, ‘XX사회’라는 규정에 정작 사회는 없다. ‘XX사회’라는 작명은 우리 사회의 근대성이 주저 앉았다는 선언, 혹은 절규에 가깝다.

이번 파문이 터진 뒤 디자인 평론가 최범은 자신의 SNS에다 이런 짤막한 글을 올려뒀다. “사회를 가족처럼 생각하면 봉건사회 / 가족을 사회처럼 생각하면 근대사회”. 낄낄 웃다가도 곱씹을수록 씁쓸하다. 이제까지 우리는 봉건사회를 살면서 그게 근대사회라 착각했는지도 모른다.

소설가 현진건은 일제하 암울한 조선의 풍경을 다룬 단편 ‘술 권하는 사회’를 1921년 내놨다. ‘Society’의 근대적 번역어로 지식인들 이외에는 사실상 낯설었을 단어인 ‘사회’라는 용어 때문에, 그 아내 되는 이는 남편에게 술 먹인다는 ‘사회’라는 게 대체 무엇인지 궁금해한다. 혹시 저기 새로 문을 요릿집 이름인가 궁리도 해본다.

대학마다 사회학, 사회학자, 사회학도가 넘쳐나지만, 정작 우리는 여전히 한국 사회라는 게 뭔지 잘 모르고 있는 건 아닐까. 유사가족의 갑질 사고가 터지고, 덩달아 현진건의 ‘술 권하는 사회’가 떠오를 때면 나도 현진건 소설 속 부인이 되어 ‘사회’란 게 어디 프랜차이즈집 이름인가 궁리해보곤 한다.

그 동안 우리가 그렇게나 술들을 마셔댄 것도 어쩌면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오늘도 어디에서 누군가는 아마 술을 마실 터이다. 10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술 권하는 ‘사회’를 한탄하면서.

조태성 문화부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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