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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 분투기] ‘꽃보다 아빠’ 되는 것의 어려움

입력
2016.02.25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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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이가 없었다면 하지 않았을 선택들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예전이라면 국회의원 선거에서 어떤 후보에게 표를 줄지 고민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가 없을 때 나는 옳다고 믿는 일에 따라, 신념에 따라 표를 행사했지만 지금은 어느 후보가 내게 더 이익이 될지 섬세하게 계산한다. 아이가 없었다면 생명보험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겠지만 혹시라도 정상 체중보다 훨씬 더 많이 나가는 내가 잘못되더라도 아이와 파트너는 계속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값비싼 보험을 들었다. 부동산 문제 역시 관심 밖이었지만 아이를 안정적으로 키우려면 내 집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우리 부부는 주택 가격에 항상 불안해 한다.

사람들이 보수화되는 것은 불안 때문이다. 엄마들이 아이를 임신한 몇 개월 동안 신체적으로 보수화되는 것도 불안 때문이다. 임신 중인 엄마들이 커피는 물론 감기약까지 피하는 것은 행여나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해가 될까 하는 걱정하는 마음 때문이다. 비슷하게 아빠들은 아이의 출생과 동시에 사회적으로 보수화된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지만 우리 사회의 전통적인 성 역할상 아빠는 여전히 경제적인 투쟁에 대한 1차적 책임을 지닌다. 비록 아빠들이 느끼는 이 책임이 자명하거나 당연시될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아빠들은 가족 특히 자녀에 대한 책임감을 다하기 위해 혼자일 때와는 다른 결정과 선택을 하게 된다. 가까운 형은 형수가 임신한 동안 대학원을 수료했지만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논문 쓰는 것을 무기한 연기했다. 논문에 드는 시간과 집중력을 생계와 관련된 일에 쏟아붓기로 한 것이다. 이처럼 아빠의 ‘성역할 의식’이 변하지 않는 한 아빠들은 불안감에 지배된 채 보수적으로 살아가게 된다.

지난 해 여성가족부에서 ‘꽃보다 아빠’라는 캠페인을 진행했던 적이 있다. 나도 거기에 아빠단으로 위촉되었다. 캠페인의 목표는 전통적인 성역할 의식을 개선하는 것이다. 그래서 꽃보다 아빠단으로 위촉되면 근사한 위촉장도 받고 ‘일과 가정 양립 실천 선서문’도 함께 낭독하게 된다. 거기 이런 내용이 있었다. “우리는 정시 퇴근으로 가족사랑을 실천하고 대한민국 모든 아빠들의 귀감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그런데 말이다. 위촉된 아빠 대부분은 정시 퇴근에 대한 부담이 없는 작가, 화가, 연예인 등의 프리랜서 아빠, 관련업계 종사자, 시간조정이 비교적 자유로운 자영업을 하는 이들이다. 위촉식이 있던 날, 정시 퇴근으로 가족 사랑을 실천하자는 선서의 내용에 부담을 느꼈을 두 분의 직장인 아빠 중 한 분은 휴가를 내지 못해 불참하셨고, 다른 한 분은 행사 중간에 자리를 비워야만 했다.

아빠들이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육아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하지만 여건이 허락하는 예외적인 경우일 때가 많다. 아빠 육아에 대해서 말을 하고 글을 쓰는 대부분은 나를 포함해 소위 일반적인 ‘직장인 아빠’가 아니다. 아마 직장인 아빠는 바쁜 직장에서의 일정과 늦은 퇴근 시간 때문에 이런 글을 읽고 쓸 여유 조차 없을 것이다. 어쩌면 고단한 직장생활 중에서도 짬을 내어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도 바빠 이런 캠페인이 있다는 것조차 모를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무상 보육이 중단되고, 교육비가 갈수록 증가하고, 언제 해고될지 모른다는 불안이 아빠들을 지배하는 이 가혹한 경제적 투쟁 속에서 아빠들은 ‘꽃보다 아빠’는커녕 ‘평범한 아빠’가 되는 것만으로도 너무 힘들다. 북유럽 사회에서 일과 가정 양립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아빠들의 육아 참여에 대한 의지와 결심 이전에 무상교육을 비롯한 사회 안전망의 구축, 사회전체의 강력한 평등에 대한 지향 등 우리와는 달리 불안감을 줄여주는 요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들만큼 힘들다고 할 수 없을지 모르겠지만, 아빠들이 일도 열심히 하고 가사에도 적극 참여한다는 것이 TV예능에서 연예인 아빠들이 육아도 하면서 돈도 버는 것처럼 간단하지만은 않다. 안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다 말하지 못하는 아빠들의 마음도 좀 알아줬으면 할 뿐이다.

권영민 ‘철학자 아빠의 인문 육아’ 저자ㆍ철학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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