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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했다는 이승엽, 우리도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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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했다는 이승엽, 우리도 행복했다

입력
2017.10.02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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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0일 잠실 LG전에서 대타로 타석에 선 이승엽이 타국 후 덕아웃으로 돌아오며 팬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30일 잠실 LG전에서 대타로 타석에 선 이승엽이 타국 후 덕아웃으로 돌아오며 팬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1995년 4월15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LG 트윈스와 삼성 라이온즈의 경기. 1-1로 맞선 9회초 류중일(전 삼성 감독)의 타석 때 여드름이 벗겨지지 않은 19세의 고졸 루키가 대타로 타석에 섰다. 상대 투수는 당시 LG의 ‘전설’로 통한 ‘노송’ 김용수. 잔뜩 긴장한 표정이었지만 김용수를 상대로 프로 데뷔 1호 안타를 신고했다. 그로부터 23년이 흘러 지난달 30일 잠실구장에서 다시 LG와 마주한 그는 3-3으로 맞선 8회초 6번 조동찬 타석 때 그 때처럼 대타로 나갔다. LG 투수 이동현은 그와 상대하기 전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했고, 와인드업을 하는 순간 클로즈업된 이동현의 글러브엔 퇴장을 앞둔 ‘전설’의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승엽(41ㆍ삼성).’ 이동현은 경기 전 어린이 팬이 만든 줄 가장 뒤에 섰다. 우상이었던 이승엽에게 사인을 받고 싶었던 이동현은 이 순간만큼은 이승엽의 팬으로 돌아갔고, 직접 사인 받은 글러브로 대타자와 상대하는 영광까지 누렸다. 이승엽은 잠실에서의 공식 은퇴 행사 다음날인 1일 잠실 LG전에서 5번 지명타자로 선발 출전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몸 상태가 다소 좋지 않아 은퇴 경기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무리하지 않고 있지만 김한수 삼성 감독은 이승엽에게 잠실에서의 마지막을 배려했다. 2회초 이승엽이 선두타자로 등장하자, 삼성 원정 팬뿐 아니라 LG 홈 팬들도 이승엽의 응원가를 부르며 전설의 마지막을 뜨겁게 배웅했다. 그는 LG 선발 임찬규의 2구째를 받아 쳐 오른쪽 담장을 직접 맞히는 2루타를 때렸다. 개인 통산 466호 홈런이 될 뻔했던 큼지막한 타구였다.

이승엽이 2002년 LG와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극적인 동점홈런을 치고 삼성의 창단 첫 우승에 다리를 놓는 순간. 삼성 제공
이승엽이 2002년 LG와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극적인 동점홈런을 치고 삼성의 창단 첫 우승에 다리를 놓는 순간. 삼성 제공

23년 전 이 곳에서 1호 안타를 쳤던 약관의 신인은 그렇게 역사가 시작된 장소에서 이별여행의 긴 여정을 마쳤다. 이승엽은 "프로 첫 안타를 친 날은 기억한다"며 "1990년대 잠실의 뜨거운 기운도 기억하고 있다. 정말 내가 선수 생활을 오래 하긴 했다"고 웃었다.

3일 홈 구장인 대구에서 현역 생활의 마지막 경기와 은퇴식을 치르는 이승엽은 KBO리그 최초로 은퇴 투어를 펼쳤다. 각 구단은 이승엽과 얽힌 추억의 선물로 이승엽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특히 롯데 자이언츠는 롯데는 순금 10돈을 들여 만든 순금 잠자리채를 이승엽에게 안겼다. 2003년 이승엽이 당시 아시아 한 시즌 최다인 56홈런을 칠 때 한국 야구장 외야를 휩쓸었던 '잠자리채 열풍'을 떠올린 선물이었다. 56번째 홈런을 허용한 롯데는 '아픈 기억'까지 스스럼없이 꺼내며 이승엽의 마지막 사직구장 방문을 기념했다. 이승엽은 "모두 평생 기념할만한 선물"이라고 고마워했다.

이승엽이 걸어온 길은 곧 한국 프로야구의 역사였다. 프로야구 최초로 통산 450홈런을 달성했고, 일본프로야구의 심장인 도쿄(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한국인 최초로 4번타자를 맡았다. 무엇보다 태극마크를 빼고 이승엽을 논할 수 없다. 그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동메달결정전에서 일본의 마쓰자카 다이스케를 상대로 결승 2타점 2루타를 터뜨려 한국의 동메달을 이끌었다. 도쿄돔 한일전 ‘영웅’의 시초도 이승엽이다. 2006년 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1라운드 일본전에서 이승엽은 1-2로 뒤진 8회초 1사 1루에서 역전 결승 우월 투런포를 쳤다. 2008 베이징올림픽에선 일본과 준결승, 쿠바와 결승에서 연거푸 극적인 결승홈런을 쏘아올렸다.

이승엽이 2008년 베이징올림픽 일본과 준결승전 8회말에 역전 2점홈런을 치며 환호하는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승엽이 2008년 베이징올림픽 일본과 준결승전 8회말에 역전 2점홈런을 치며 환호하는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IMF로 고통 받던 시절 국민들은 스포츠로 속상한 감정을 달랬다. 맨발 투혼으로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던 골프의 박세리,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 박찬호, 2002 월드컵 4강 신화의 한 주역이자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무대를 누볐던 박지성, 피겨스케이팅 변방의 설움을 털어버리고 전세계를 사로잡았던 김연아 정도가 떠오른다.

이승엽이 남긴 족적은 열거할 수 없지만 그가 추앙 받는 이유는 대스타로 보기 드물게 실력과 정비례한 인성 덕분이다. 사생활 관리, 팬 사랑 실천, 매너 등에서도 흠잡을 게 없다. 신인 때나 정점에 있을 때나, 은퇴를 앞둔 지금이나 한결같이 겸손한 그는 “아마추어가 아니라 프로다. 남들보다 뛰어나야 한다. 바른 모습, 모범이 되는 모습, 어린이들에게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선수가 되어야 한다”고 늘 강조해 왔다. 그래서 국민타자 앞에 붙는 ‘국민’은

이승엽에게만 붙을 수 있는 수식어가 됐다.

이승엽은 “3일 경기를 최상의 몸 상태로 치르고자 준비 중”이라고 말하면서 “두 아들(은혁, 은준 군)에게는 누구보다 강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이고 싶다. 또 아내(이송정씨)가 처음으로 그라운드 안으로 들어와 시구한다"며 "그날만큼은 내가 주인공이고 싶다"고 밝혔다. 한국 야구를 화려하게 수 놓으며 지나간 열차의 종착역 앞에 다다른 이승엽은 “야구를 좋아했고, 인정해줬으니 만족하고 나는 정말 행복한 선수였다”고 말한다.

성환희기자 hhs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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