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기억할 오늘] 노비해방 선언(11월 1일)

입력
2017.11.01 04:40
30면
0 0
경남 진주에서 1924년 출범한 '형평사'는 백정들의 평등권 전국운동 조직이었다. 사진은 제6회 전국대회 포스터. 진주시청
경남 진주에서 1924년 출범한 '형평사'는 백정들의 평등권 전국운동 조직이었다. 사진은 제6회 전국대회 포스터. 진주시청

서재필 윤치호 등이 설립한 독립협회(1896~1898)의 공과(功過)와 한계 등을 두고 논란이 있지만, 조선(당시 국호는 대한제국)의 신분제 폐지를 공개적ㆍ실질적으로 천명한 민간 주체였다는 점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

조선의 신분제(공ㆍ사 노비제)는 1894년 갑오개혁을 통해 공식적으로 폐지됐다. 하지만 선언적 의미였다. 조선의 신분제, 양반-노비제는 사실 18세기 말부터 흔들렸다. 부모 한쪽만 노비여도 자녀를 노비로 삼던 신분제는 구조적으로 명이 길 수 없었다. 노비는 세금과 부역의 면제자였다. 양인 몰락이 가속화하면서 조정은 1801년 왕실과 중앙 관청의 공노비를 해방했고, 갑오개혁 8년 전인 86년 노비 세습 및 매매를 금했다. 그 조치는 인권ㆍ평등을 위해서가 아니라 체제 유지를 위해서였다. 하지만 지방 관청의 공노비를 비롯, 양반 및 세도가의 노비는 그 수가 줄어들긴 했지만 버젓이 존재했고, 조정의 명은 사실 법도 아니었다.

1897년 국호를 ‘대한’으로 정한 대한제국이 출범했다.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등으로 왕실의 위신이 곤두박질쳤고, 개화파 지식인이고 양민이고 할 것 없이 자주적 정부의 필요성을 어느 때보다 요구하던 때였다. 고종은 궁을 경운궁(현 덕수궁)으로 옮기고 광무(光武)라는 연호를 쓰면서,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독립협회는 개화파 중심 민간 조직이긴 했지만, 대한제국 광무개혁의 일환으로 탄생한 준 관변단체였다. 그들은 “만백성의 참정권”에 기반한 영국식 ‘입헌군주제’를 이념으로 표방했다. 계몽 및 여론수렴 목적의 만민공동회는 의회를 지향한 기초작업이기도 했다.

노비ㆍ백정의 민민공동회 참여 문제, 다시 말해 참정권은 행사 초기부터 논란 거리였다. 서재필과 윤치호는 노비해방 문제를 공식 의제로 채택, 1897년 11월 1일 제8회 토론회를 열었다. 신용하의 ‘독립협회 연구’에 따르면 그 토론회에는 500여 명이 참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고 한다. 윤치호도 나서 미국의 흑인노예 참상과 조선의 노비ㆍ백정의 처지를 비교하며 그 폐해를 비판했다. 참가자들은 즉석투표를 벌여 만장일치 노비 석방안을 의결했다. 한성부의 양반가부터 노비문서를 불태워야 한다는 결의가 이어졌고, 실제로 그 결의에 따른 이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최윤필 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