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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좁은 골목 따라 알록달록 푸릇푸릇

입력
2016.06.22 04:40
수정
2018.12.17 16:33
0 0
‘나란히 나란히’ 서울 중구 만리동. 나팔꽃 덩굴.
‘나란히 나란히’ 서울 중구 만리동. 나팔꽃 덩굴.
‘나란히 나란히’ 서울 용산구 후암동.
‘나란히 나란히’ 서울 용산구 후암동.
‘담장 위에도’ 서울 용산구 원효로.
‘담장 위에도’ 서울 용산구 원효로.
‘담장 위에도’ 서울 용산구 원효로
‘담장 위에도’ 서울 용산구 원효로
‘먹고 살자고’ 서울 중구 중림동. 고추 열매가 열렸다.
‘먹고 살자고’ 서울 중구 중림동. 고추 열매가 열렸다.

“아침에 일어나 조금씩 영글어 가는 모습 보는 재미죠. 내겐 이 고추 열매가 꽃보다 훨씬 예뻐 보여요.” 서울 중구 중림동에 사는 유연래(69ㆍ여)씨가 지난 16일 집 앞 골목에 나란히 세워 둔 화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유씨는 “작년에 고추만 심었더니 누가 하루아침에 다 따 가 버렸다”며 속상했던 기억을 꺼냈다. “그래도 같이 먹고 살아야지….” 유씨는 올해 고추 대신 이파리를 여러 번 딸 수 있는 들깨를 더 많이 심었다. 멀찌감치 골목 깊숙한 곳에선 이웃집 고추 화분이 담장 너머 쏟아지는 햇빛을 한껏 받고 서 있다.

‘나란히 나란히’ 서울 중구 중림동의 골목 풍경.
‘나란히 나란히’ 서울 중구 중림동의 골목 풍경.

중림동을 나서 고갯길 따라 자리 잡은 아파트 단지와 또 다른 아파트 신축 공사장 사잇길을 오르면 미로처럼 복잡한 만리동 골목이 시작된다. 초여름 뙤약볕 아래 반복되는 경사로와 계단 때문에 숨이 차 올랐다. 궁핍한 삶이 거미줄처럼 얽힌 달동네 골목길은 허름하고 비좁지만 한편으로 포근하다. 곳곳에 넘치도록 즐비한 화분들, 소박한 ‘골목 정원’ 덕분이다. 길 옆이나 대문 앞, 담장 위에 자리 잡은 화분마다 화사한 초록빛을 발산하고 있다. 두 다리는 지쳐가도 알록달록 핀 장미와 나팔꽃, 접시꽃을 감상하는 두 눈은 호강이다. 폭신한 과일 포장재부터 수명 다한 아이스박스나 스티로폼 박스, 고무대야, 페인트 통 등 소박한 멋이 넘치는 재활용 화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주민 김점순(65ㆍ여)씨는 “골목 화분은 아파트 단지에선 볼 수 없는 이 동네만의 풍경”이라며 “이런 나무나 꽃이 없으면 얼마나 삭막하겠나”라고 말했다.

‘창의적 재활용’ 과일 포장재, 스티로폼 박스, 아이스박스, 현수막 재활용 포대.(사진 왼쪽부터 시계방향)
‘창의적 재활용’ 과일 포장재, 스티로폼 박스, 아이스박스, 현수막 재활용 포대.(사진 왼쪽부터 시계방향)
‘창의적 재활용’ 서울 마포구 연남동의 한 돼지고기 전문 식당의 그릴 모양 화분(왼쪽)과 플라스틱 용기 재활용 화분.
‘창의적 재활용’ 서울 마포구 연남동의 한 돼지고기 전문 식당의 그릴 모양 화분(왼쪽)과 플라스틱 용기 재활용 화분.

골목 정원은 막다른 길에 이르러 더욱 풍성해진다. 골목 끝 제법 넓은 공간, 노인들이 걸터앉은 나무의자 옆에서 초록색 토마토가 익어 가고 있다. 다닥다닥 붙은 각각의 화분에선 오이 고추 돼지감자 생강이 자란다. “앉아서 보고 있자면 신기하지.” “밭도 아닌데 저렇게 잘 자라는 것이 참….” 노인들이 한마디씩 거든다. 조각 볕 아래에서 토란과 호박까지 넝쿨째 키워 내는 화분은 그야말로 싱싱한 텃밭이다. “우리 같은 노인네들이야 시간 많으니까 심고 가꾸지.” 나정자(76ㆍ여)씨는 ‘가꾸는 즐거움’을 젊은 세대와 함께 하지 못해 아쉽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편히 살 궁리만 하니 이런 건 귀찮지. 생명의 아름다움을 같이 보면서 느끼면 좋은데 그걸 잘 몰라.”

0 ‘먹고 살자고’ 서울 중구 만리동. 손가락 한 마디 만한 토마토가 익어가고 있다.
0 ‘먹고 살자고’ 서울 중구 만리동. 손가락 한 마디 만한 토마토가 익어가고 있다.
‘먹고 살자고’ 서울 성동구 성수동.
‘먹고 살자고’ 서울 성동구 성수동.
‘먹고 살자고’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무럭무럭 자라는 상추.
‘먹고 살자고’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무럭무럭 자라는 상추.
‘먹고 살자고’ 서울 중구 만리동. 빈 화분에 먹다 남은 대파를 꽂아 두었다.
‘먹고 살자고’ 서울 중구 만리동. 빈 화분에 먹다 남은 대파를 꽂아 두었다.

1970~80년대에서 시간이 멈춘 듯 구불구불한 샛길을 따라 아현동으로 내려오면 ‘오복 슈퍼’ 앞 아담한 화분 진열대가 시선을 끈다. 치자꽃, 접시꽃과 함께 자식들이 사다 준 카네이션도 화분에 옮겨 심으니 활짝 폈다. 같은 자리에서 수십 년째 화분을 가꿔 온 슈퍼 주인 김광자(63ㆍ여)씨는 “저절로 자라는 것 같아 보여도 손이 꽤 많이 간다” 며 “화분은 정성”이라고 강조했다. 김씨는 “아침저녁으로 물 주는 건 기본, 때 되면 분갈이에 지지대도 만들어 줘야 하고 겨울엔 집 안으로 들여 놓아야 죽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정성으로 보살핀 꽃나무는 끈질기게 살아났다. 이웃 동네에서 ‘동네 슈퍼’를 운영하는 서희자(68ㆍ여)씨는 몇 년 전 쓰레기 더미에 버려진 백년초를 주워다 화분에 심었다. 서씨 스스로도 “작은 꽃나무의 생명력에 놀랐다”고 감탄한 백년초 화분은 해마다 아이스크림 냉장고 앞에서 노란 꽃망울을 터뜨려 주었다.

‘친구랑’ 서울 마포구 아현동. 아이스크림 냉장고 앞에 놓인 화분에서 백년초 꽃이 활짝 폈다.
‘친구랑’ 서울 마포구 아현동. 아이스크림 냉장고 앞에 놓인 화분에서 백년초 꽃이 활짝 폈다.
‘친구랑’ 서울 용산구 후암동.
‘친구랑’ 서울 용산구 후암동.

골목마다 생기를 전하는 화분은 상습적인 쓰레기 무단투기를 막는데 동원되거나 무단주차 방지용으로 투입되기도 한다. 온 몸으로 쓰레기를 막아내는 양심 화분 덕분에 쓰레기 투기는 줄었을지 몰라도 다짜고짜 꾸짖는 경고문과 함께 칭칭 묶인 화분의 운명이 처연하다. 눈총을 받아가며 온 몸으로 주차를 막아내는 길 위의 화분 역시 기구하긴 마찬가지다. 통행이 방해될 경우 화분 주인은 불법 노상 적치 행위로 단속 대상이 될 수 있는 위험한 임무다. 아현동에서 이발소를 운영하는 노마리(61ㆍ여)씨는 몇 년 전 어쩔 수 없이 점포 출입문 앞에 화분을 세워두었다. “출입문 앞에 차를 대 놓고 연락처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사람들 때문에 골치를 썩였다”는 노씨는 “화분을 놓고 나니 불법주차는 사라지고 나무 키우는 재미가 새로 생겼다”라고 말했다.

도란도란 수다 소리를 따라 골목을 돌아 들어가니 기다란 담장 그늘로 노인들이 마실을 나와 있다. “저쪽 파란 대문 집 고추가 아주 잘 됐어. 그 집에 한 번 가봐.” 동네 화분 구경 중이라는 말에 한 노인이 올해 고추 풍년 들었다는 집을 소개해 줬다. “우린 이 골목에서 어느 집이 화분에 뭘 심고 맛이 있는지 없는지 다 알아. 이게 꼭 자식 농사 같아. 잘 되면 기쁘고 잘 안되면 슬프고, 남의 집 잘 된 것 보면 부럽고….” 초여름 태양이 어느덧 서쪽 하늘로 기울자 노인들도 하나 둘 골목 안으로 사라졌다.

박서강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류효진기자 jsknight@hankookilbo.com

신재훈 인턴기자

‘양심불량 퇴치용’ 서울 마포구 아현동. 쓰레기 무단 투기를 막기 위한 양심 화분의 모양새가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
‘양심불량 퇴치용’ 서울 마포구 아현동. 쓰레기 무단 투기를 막기 위한 양심 화분의 모양새가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
‘주차 안 됩니다’ 서울 용산구 원효로.
‘주차 안 됩니다’ 서울 용산구 원효로.
‘담장 위에도’ 서울 중구 만리동. 대문 기둥 위에 올려 놓은 고무 대야 화분에 상추가 심어져 있다.
‘담장 위에도’ 서울 중구 만리동. 대문 기둥 위에 올려 놓은 고무 대야 화분에 상추가 심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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