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객기가 추락 위기에 처한다. 기장이 순발력을 발휘해 강 위 비상착수에 성공한다. 대재앙을 예감했던 관계자들은 가슴을 쓸어 내리고, 목숨을 건진 승객들은 환호한다. 언론은 발 빠르게 기적을 전하고 사람들은 갈채를 쏟아낸다. 당연하게도 기장은 영웅으로 떠오른다. 한데 미 연방교통안전위원회(NTSB)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다. 기장이 여객기가 이륙했던 공항으로 회항하라는 관제탑의 지시를 어기고 위험천만한 모험을 택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부 언론은 기장이 승객의 목숨을 걸고 무리한 위기 탈출 방식을 택했다고 비난한다.
영화의 서두는 진부한 이야기 틀을 예감케 한다. 관료제의 비정한 면모에 신랄한 비판을 하리라 생각할 수 있고, 과연 영웅은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라는 호기심을 자극할 듯하다. 관객의 ‘불길한’ 예감은 기분 좋게 빗나간다. 2009년 미국 뉴욕에서 벌어진 실화를 스크린에 옮긴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은 기본에 충실한 미국 영웅들의 평범하면서도 눈에 띄는 활약상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영웅적인 행동의 안팎을 전하며 미국 사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그 메커니즘이 어떻게 미국을 발전시키는지 전한다.
기적은 어떻게 찾아오나
부제가 말하듯 영화는 기적적인 일화를 소재로 삼았다. 2009년 1월 15일 뉴욕 라궈디아공항에서 이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새떼와 충돌한 유에스 에어웨이스 1549편의 기막힌 사연이 스크린을 채운다. 1549편의 기장 설리(톰 행크스)는 회항과 인근 공항으로의 비상착륙을 유도하는 관제탑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다. 양쪽 엔진이 다 멈추고 고도까지 떨어진 상황에서 허드슨강 위로의 비상착수가 알맞은 대안이라고 순간적으로 판단한다.
비상착수는 심각한 인명 피해가 예상되기에 관제요원은 말리지만 설리는 비상착수를 단행한다. 설리의 오랜 비행 경험과 재빠른 판단으로 1549편은 차가운 겨울 강 위에 사고 없이 내려 앉는다. 주변에 있던 통근 보트가 구조에 나서고, 뉴욕 경찰까지 긴급 출동하며 비상착수 28분만에 승객과 승무원 155명 전원이 구출된다. 빠르고 적절한 판단, 긴급 구조에 재빠르게 나선 사람들의 선의 등이 맞물리며 기적은 현실이 된다. 착수 각도가 1도만 틀어졌어도 큰 사고로 이어질 뻔했으니 기적이란 수식이 붙을 만하다.
영화는 설리의 회상을 통해 기적의 순간들을 재구성한다. 그런데 설리는 단순히 감회에 젖기 위해 아찔했던 순간을 떠올리지 않는다. 여러 목숨이 죽음에 이를 수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자신이 오판했으면 어떻게 됐을지 악몽에 시달릴 때나, 그의 선택이 규정에 맞았는지 살펴보는 NTSB 조사 과정에서의 회상을 통해 사건을 돌아본다. 설리는 자신의 영웅적인 판단으로 150여 인명을 구했다는 사실에 우쭐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의 오판 여부를 조사하는 NTSB의 행태에 대해서도 딱히 불만을 드러내지 않는다.
일상에 숨어 있는 미국의 영웅들
영화는 특출한 개인이 아닌, 시스템이 만들어낸 영웅을 조명한다. 어려서부터 비행기 조종사에 대한 꿈을 품었을 설리는 그리 특별한 기장이 아니다. 미국 하늘을 수시로 오가며 나이를 먹고, 조종으로 번 돈으로 생계를 잇고 가족을 꾸렸을 것이다. 영화가 설리의 젊은 시절을 굳이 자세히 돌아보지 않는 이유다. 그가 비상착수 뒤 “아직 누구 있습니까”를 외치며 승객들이 다 탈출했는지 좌석을 일일이 확인한 뒤 가장 마지막에 비행기를 떠난다. 한국인이라면 부러워할 만한 일이나 설리는 기장으로서 지켜야 할 매뉴얼에 충실했을 뿐이다. 설리는 육지에 도착한 뒤 승객들이 모두 무사한지 계속 점검하며 기장으로서의 의무를 다한다. NTSB 청문회에서 사고 당시 조종실에서 있었던 대화를 청취한 뒤 설리는 동료 조종사 제프(에론 에크하트)에게 “나는 자네가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제프가 ”침착하게 매뉴얼대로 행동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우린 할 일을 했다”며 소박하게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한다.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전작 ‘아메리칸 스나이퍼’에서도 전쟁 영웅이 된 평범한 미국 시민의 짧은 삶을 그린다. 이라크 전쟁에 참전해 저격수로 명성을 떨친 크리스 카일(브래들리 쿠퍼)은 입대 전 그다지 빛나는 삶을 살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아버지 손에 이끌려 사냥에 나서면서 남다른 사격 솜씨를 일찌감치 익혔던 카일은 9·11 테러에 격분해 늦은 나이에 입대하고 자신의 재능을 뒤늦게 발휘한다. 카일은 고통스러운 훈련을 마치고 네이비실의 전사가 되고 특급 저격수로 거듭 난다. 부대에서 영웅 취급을 받지만 카일은 그런 상황을 딱히 즐기지 않는다. 몇 시간 동안 한 자리에서 머물며 용변까지도 ‘자체 처리’하는 카일은 서민적 영웅의 풍모를 보여준다. 카일은 전장에서 돌아와 전쟁 후유증에 시달린다. 영웅적인 행동을 하고도 의심을 받는 설리의 상태와 맞닿는다.
‘건전 보수’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미국 사랑
‘설리’에서는 이스트우드의 유별난 미국 사랑이 드러난다. 민주당 지지자들이 다른 분야에 비해 유난히 많은 할리우드에서 이스트우드는 열렬한 공화당 지지자다. 이스트우드의 영화들은 건전 보수를 자처하는 그의 정치적 성향을 종종 반영하곤 하는데, ‘설리’도 마찬가지다.
‘설리’의 등장인물들은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다. 설리와 제프는 매뉴얼대로 행동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관제탑 요원도 정해진 원칙에 의해서 움직인다. 주인공 설리에 감정이입을 하기 마련인 관객들에게는 얄미운 존재일 수 있는 NTSB 직원들도 자기 직무를 수행할 따름이다. 이륙에서 착수까지 단 208초 동안 벌어진 일 때문에 40년 비행 경력을 평가 받게 된 설리는 NTSB 직원의 직무를 존중하기에 굳이 억울함을 호소하지 않는다. 누명을 쓰지 않기 위해서 이성적으로 자기 논리를 준비하고 NTSB 직원들의 주장을 뒤집는다. 사회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각자의 역할에 충실해야 하며, 어떤 사고가 발생했을 때는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누구에게 문제가 있었는지를 살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를 발견할 수 있다.
영화는 끝을 맺을 때 2009년 사고 당시의 영상과 사진을 보여준다. 허드슨강에 떠 있는 여객기와 여객기 날개 위에서 구조를 기다리는 승객들의 모습을 비추고 승객들이 구조된 뒤 도착한 선착장 인근에 걸린 성조기를 보여준다. 위대한 나라 미국이기에 가능했던 기적이라는, 그 기적은 미국의 실용주의에서 비롯됐다는 웅변으로 읽힌다. ‘아메리칸 스나이퍼’도 카일의 장례 행렬을 담은 기록영상을 마무리 화면으로 활용한다. 사람들은 성조기를 들고서 카일의 죽음을 애도한다. ‘설리’의 마지막 장면이 자연스레 오버랩 된다. 미국적인 가치를 끔찍이도 사랑하는 보수주의자 이스트우드의 마음은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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