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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휘발유 값이 1원인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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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휘발유 값이 1원인 나라

입력
2018.06.05 19:0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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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휘발유가 L당 1원, 프리미엄급이라고 해도 8원인 나라가 있다. 베네수엘라 이야기다. 사우디아라비아를 능가하는 세계 최대 원유 매장량을 가진 나라라서 휘발유가 물보다 쌀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 정부가 환율을 조작하고 가격을 통제해서 공짜나 다름없이 공급했다.

휘발유가 거저나 다름없으니 너 나 할 것 없이 차를 샀다. 경제 수준에 걸맞지 않게 차량이 늘어나고 만성적인 교통 체증에 시달렸다. 자동차나 부품, 그리고 이에 필요한 윤활유 수입을 위해 베네수엘라는 막대한 달러를 지출했다. 국영석유회사인 PDVSA는 원가 이하로 휘발유를 팔면서 적자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부채투성이가 됐다. 채권자들의 압류로 정상적인 운영이 불가능해졌다.

이런 모순이 쌓여 베네수엘라 경제는 파탄이 났다. 국가부도 상태로 국제금융시장에서 퇴출됐다. 국가채무 등 각종 통계를 믿지 못하게 됐고 아무도 돈을 빌려주려 하지 않았다.

국민 생활은 비참한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물가상승률이 얼마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4월 1만3,864%로 추정했다. 물가가 이틀이면 두 배가 되고, 중남미 국가가 경험한 것 중 역사상 최악의 수치지만 현실은 그보다 훨씬 심각하다. 값이 문제가 아니라 식량을 구할 수 없고 병원에는 약품도 바닥났다. 원유 부국의 국민은 콜롬비아 등 인근 국가로 탈출하고 있다.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은 경제 파탄은 아랑곳하지 않고 5월 20일 치러진 선거에서 야당에 재갈을 물리고 승리했다. 그는 베네수엘라의 성공이고 역사적인 순간이라고 자찬하여 국제적인 비웃음을 사고 있다.

혹자는 베네수엘라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전임자인 차베스 대통령이 19년 전 물꼬를 튼 무상복지 정책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선심성 정책을 남발하면서 정부 곳간은 텅 비게 됐고국민은 무료에 길들여져 일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상복지가 베네수엘라 경제 난국의 주범이라는 논리에는 동의할 수 없다. 독일 영국 프랑스 등 유럽 선진국가들이 무상으로 많은 복지를 제공하고도 국민들이 열심히 일하는 건실한 경제를 이루고 있는 것을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베네수엘라 경제가 망가진 진짜 원인은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생필품 가격을 정부가 통제해서 원가에 못 미치는 싼값으로 공급하는 무리한 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발상을 바꿔 가격은 시장에서 자유롭게 결정되도록 하고 어려운 사람에게만 보조금을 지급했더라면 경제가 이 지경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차량 구입, 휘발유 소비가 합리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달러 낭비를 막을 수 있었다. 재정건전성을 염두에 두었더라면 어느 나라보다 많은 복지프로그램을 오랫동안 제공할 수 있었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홍콩의 무상복지정책은 그런 면에서 인상적이었다. 모든 가구에 전기요금을 매달 300홍콩달러씩 6개월간 지원했다. 전기회사는 원래 가격대로 요금을 부과하고 정부 지원 금액을 제외한 차액을 이용자가 납부하는 방식이다. 같은 금액일 경우에도 요금을 인하하기보다 차액만큼을 보조금으로 주라는 경제이론에 충실했다. 재원은 재정수지 흑자를 통해 쌓아둔 정부저축으로 충당했다. 포퓰리즘이라는 비판이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시장가격체계를 왜곡시키지 않고 재정건전성을 지킴으로써 경제에 미치는 부작용 없이 어려운 시기에 처한 시민들을 도왔다. 베네수엘라의 기름값 복지와 차별화되는 이유다.

양극화 해소라는 시대적 명제를 위해서는 과감하게 사회안전망을 확충해나가야 한다. 우리가 구비해가야 할 복지정책은 유상일 수도 있지만 거저라도 마다할 이유는 없다. 베네수엘라에서 교훈을 찾는다면 유ㆍ무상 여부보다는 시장에서 결정되는 가격 신호를 존중하면서 중장기적인 재정건전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광해 우리금융경영연구소 대표 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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