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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성 칼럼] 대북 인도적 지원의 타이밍

입력
2017.09.18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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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통령, 주변 4강에 괴롭힘 당하는 형국

대북 대화와 인도적 지원 시기 선택이 중요

유엔 무대 데뷔는 전략과 역량 다질 기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엊그제 문재인 대통령과 통화한 뒤 트위터에 글을 올렸다. 미사일 도발을 일삼는 김정은을 로켓맨이라고 부르며 새 대북 제재 결의 2375호로 북한이 유류난을 겪는 걸 비꼬는 내용이다. 그런데 일부 언론이 주유를 위해 늘어선 ‘gas lines’를 문 대통령이 최근 러시아 방문 때 밝힌 ‘남ㆍ북ㆍ러 천연가스 파이프 라인’으로 잘못 해석해 트럼프가 또 문 대통령을 겨냥했다고 보도했다.

휘발유(gasoline)를 ‘가스(gas)’로 줄여 쓰는 것을 놓쳐 생긴 오역이겠지만 이건 좀 심하다. 이달 초 트럼프 대통령이 문 대통령의 대북 대화 정책을 비판하는 트윗을 날렸던 게 선입견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청와대가 유감을 표명했듯이 “트럼프가 우리를 비난했을 것”이라는 프레임이 작용했다면 부끄러운 일이다. 트럼프가 뭐라고 한마디 하면 그 말의 타당성을 따져보기도 전에 지레 문 대통령 잘못이라거나 한미동맹 관계에 심각한 위기가 발생한 것처럼 인식하는 자세는 분명 문제가 있다.

물론 문 대통령이 빌미를 제공한 측면도 따져 봐야 한다. 하지만 대한민국 대통령이 억센 주변 4강 스트롱맨들로부터 이리저리 치이는 일이 잦다 보니 대한민국 국민 한 사람으로서 자존심이 상한다. 문 대통령은 얼마 전 푸틴 대통령에게 대북 원유공급 중단 동참을 요청했다가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원유 공급 중단으로 병원에 전기가 끊기면 환자 생명 등 인도적 피해가 발생한다는 충고까지 들었다.

엊그제 북한이 중장거리 미사일 화성 12호 발사 직후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가진 통화에서는 우리 정부의 대북 인도적 지원 방침에 대한 불만을 들었다. 자국 영토 위로 북한 미사일이 날아간 상황은 이해하지만 우리로서는 듣기 거북했다. 중국 시진핑 주석도 주한미군 사드 배치와 관련해 노골적으로 문 대통령에게 불만을 드러내 왔다. 배경은 조금씩 다르지만 주변 4강 정상들로부터 문 대통령이 집단 괴롭힘을 당하는 형국이다.

국내 상황도 별로 나을 게 없다. 문 대통령은 사드 등 안보 문제와 관련해 보수와 진보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당하고 있다. 정말 대통령 노릇 하기 힘든 상황이다. 움치고 뛸 수 없는 지정학적 상황은 전혀 감안하지 않고 무조건 대통령부터 비난하는 태도는 지양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제한된 조건 하에서나마 문 대통령과 외교안보 라인이 지혜롭게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국제기구를 통한 대북 인도적 지원 재개 문제만 해도 그렇다. 800만 달러 규모 대북 인도적 지원이 적절한지의 논란에 대한 통일부의 설명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특히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 수위가 한층 높아진 상황에서 임산부, 5세 미만 아동 등 북한의 취약계층에 대한 인도적 지원이 더욱 필요해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과거 이란과 이라크에 대한 국제사회의 제재 당시 정작 고통받아야 할 집단은 멀쩡하고 대신 수십만 명의 어린이와 노약자들이 고통받고 희생당했다. 제재의 역설이다.

국제기구가 모니터링을 통해 감시하는 인도적 지원은 이러한 제재의 한계와 부작용을 극복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대북 초강경파 니키 헤일리 주유엔 미국대사까지도 추가 제재와 관련해 “북한주민들이 피해를 입을 수 있는 인도주의적 측면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6차 핵실험과 연이은 미사일 발사로 북한에 대한 분노가 최고조에 이른 시점에서 대북지원 재개를 결정하겠다고 하니 국내외에서 거센 반발이 안 나오면 그게 이상하다.

마침 이 시기에 국제기구가 요청을 해 왔고, 정치적 상황과 인도주의 문제는 별개라는 논리로는 충분하지 않다. 제재 압박에 적극 참여하지만 결국에는 대화와 협상으로 북한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문 대통령의 말은 지당하다. 하지만 제재 압박의 동력을 대화 국면으로 전환시켜 가려면 치밀한 전략과 종합적 디자인이 필요하다. 문 대통령의 유엔총회 다자외교무대 데뷔는 그런 전략과 역량을 벼리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논설실장 wk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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