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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도] 평창의 사기꾼 혹은 무한도전

입력
2018.03.01 16:1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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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9일 강원 평창 휘닉스 스노 경기장에서 열린 평창동계올림픽 프리스타일 스키 여자 하프파이프에 출전한 헝가리 대표 엘리자베스 스와니가 고난도 기술 없이 슬로프를 내려오고 있다. 평창=AP 연합뉴스
지난달 19일 강원 평창 휘닉스 스노 경기장에서 열린 평창동계올림픽 프리스타일 스키 여자 하프파이프에 출전한 헝가리 대표 엘리자베스 스와니가 고난도 기술 없이 슬로프를 내려오고 있다. 평창=AP 연합뉴스

프리스타일 스키가 뭔지, 그 중에서 하프파이프가 어떤 종목인지는 더더욱 몰랐던 나에게도 ‘이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반으로 자른 파이프 모양의 기울어진 원통형 슬로프를 좌우로 오가며 공중회전과 점프 등 온갖 묘기를 펼쳐 점수를 따는 게 하프파이프 경기인데, 평창 동계올림픽에 출전한 헝가리 여자 대표 엘리자베스 스와니의 경기는 특별했다. 곡예와 같은 공중회전은커녕 기본적인 점프도 없었다. 슬로프에서 방향을 바꾸기 위해 아주 잠시 폴짝 뛴 것이 전부. 심지어 그것조차 불안해 보였다. 막 걸음마를 뗀 어린아이가 얼음판에서 넘어지지 않기 위해 조심조심 걷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경기를 앞두고 갑자기 다쳤거나 점프를 하지 못할 심리적인 이유가 생겼던 것도 아니었다. 그에겐 최선을 다한 경기였다. 결과는 100점 만점에 31.4점을 받아 24명 중 꼴찌.

스와니의 경기 영상이 유튜브 등에 공개되자 ‘올림픽 수준’의 묘기를 기대했던 전세계 스포츠 팬들 사이에선 난리가 났고, 논쟁이 시작됐다. “그는 스키선수라고 할 수 없다. 저 정도는 나도 할 수 있다”는 비아냥은 온건한 축이었다. ‘최악의 올림픽 선수’, ‘올림픽을 농락한 사기꾼’이란 원색적인 비난이 쏟아졌다.

스와니가 논쟁의 타깃이 된 것은 초보 수준의 경기력 외에 과거 경력과 올림픽 출전권 획득 과정 때문이기도 했다. 미국 출신으로 버클리대와 하버드대 대학원을 졸업한 그가 스키를 시작한 것은 26세 때인 2010년. 하프파이프를 선택한 것은 ‘틈새 전략’이었다. 월드컵 등 세계대회 참가 선수가 24~28명에 불과한 점을 노린 것이다. 13차례 월드컵에 참가하면서 올림픽 출전을 위한 포인트를 차곡차곡 쌓았는데, 여기서도 넘어지지 않고 무사히 경기를 마치는 전략을 썼다. 화려한 점프를 시도하다 넘어진 선수 보다 좋은 점수를 받기도 하면서, 올림픽 출전 기준(세계 30위 이내)을 충족시켰다.

국가별 출전 선수 제한(4명) 규정 때문에 미국 대표로 뽑히는 게 불가능하자 ‘국적 쇼핑’도 했다. 처음엔 어머니가 태어난 베네수엘라로 국적을 바꿨다가 결국 조부모의 나라인 헝가리 대표 선수가 됐다. 영리한 엘리트가 국가대표 선발 제도의 맹점을 이용해 올림픽 무대에 선 것이라는 비난이 거셌고, 당장 헝가리 올림픽 위원회는 대표 선발 방식을 재고하겠다고 나설 정도다.

그런데 스와니가 진짜 사기꾼일까. 그는 “수년간 노력해 올림픽 출전을 이뤄냈다”며 “프리스타일 스키를 시작하는데 늦은 나이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꼼수를 썼다고 볼 수도 있지만, 적어도 그는 규정을 어기진 않았다. 오히려 철저히 규정을 따랐다. 그의 꼼수 때문에 올림픽 출전권을 뺏긴 선수도 없다. 스폰서의 지원을 받는 선수들도 있지만, 그는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를 통해 모금하거나 파트 타임으로 일하면서 대회 출전 경비를 마련했다.

스와니를 보면서, 올림픽엔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출전할 수 있도록 해야겠지만 모든 선수들이 괴물이나 천재일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운동 외에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초인적인 노력으로 무시무시한 경기력을 보여주는 선수들에게 열광하고, 모든 대표 선수들에게 그런 노력을 은연중에 강요했던 게 올림픽을 대하는 우리의 민낯은 아니었을까.

우리 정서로 보면 스와니는 조국을 버린 배신자이지만, 메달 획득을 위해 무분별한 귀화를 조장하는 국가의 ‘선수 쇼핑’보다 부도덕하다고 볼 수도 없겠다. 올림픽 성적을 위해 선수들에게 약물을 사용하도록 한 정신 나간 국가도 한둘이 아니었다.

어떤 의미에서 스와니는 성공한 ‘무한도전’이고, 새로운 길을 연 개척자로 볼 수 있겠다. 빨리 달리지 못하거나 힘이 세지 않고 재능도 부족하지만, 올림픽 출전 꿈과 의지가 불타는 이들에게 ‘이렇게 해봐’라고 제시하는 솔루션처럼 말이다.

한준규 디지털콘텐츠부장 manbo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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