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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키운 8할은] 길을 잃으면 곱씹는 질문 “내 이야기의 본질은 뭘까”

입력
2017.05.06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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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아닌 관객 입장서 생각하기

처음 떠오른 아이디어 버리기 등

픽사의 원칙 영화보다 매력적

성공보다 도전의 중요성 강조

늙거나 소외된 주인공들 노력

실패서 배운다는 사실 일깨워

"오랫동안 내가 픽사의 주인공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뒤늦게 깨달았다. 그들이 타고나길 용감해서도, 대단히 영웅적이라서도 아니다. 어딘가 모자라거나, 지나치게 늙거나, 소외되었던 이들이 자신의 꿈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이 나를 늘 이끌었던 것이다." 아르테 제공
"오랫동안 내가 픽사의 주인공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뒤늦게 깨달았다. 그들이 타고나길 용감해서도, 대단히 영웅적이라서도 아니다. 어딘가 모자라거나, 지나치게 늙거나, 소외되었던 이들이 자신의 꿈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이 나를 늘 이끌었던 것이다." 아르테 제공

나는 픽사의 영화를 좋아한다. 그 중 아내 엘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시간 속에 사라진 파라다이스 폭포를 찾아 떠나는 칼 할아버지의 이야기인 애니메이션 ‘업’의 첫 10분은 얼마나 자주 봤는지 기억력이 형편없는 나 같은 사람도 대사 몇 개는 말할 수 있을 정도다. ‘업’은 픽사의 열 번째 영화로, 나는 모험가 정신으로 똘똘 뭉쳤던 이들 부부를 사랑했다. ‘니모를 찾아서’ ‘업(UP)’, ‘토이 스토리’, ‘인 사이드 아웃’까지 픽사의 캐릭터들은 눈부시게 역동적이다. 하지만 정작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픽사의 영화가 아니라, 픽사의 스토리텔링 규칙이다. 픽사에는 스토리텔링에 대한 규칙이 22가지나 있다.

‘작가가 아닌 관객의 입장에서 무엇이 더 재미있을지 생각하고, 작가와 관객은 서로 매우 다를 수 있다’는 픽사의 두 번째 원칙이나 ‘주인공이 좋아하고 잘하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그 반대의 것을 줘서 그를 고난에 빠트리고, 그것을 어떻게 헤쳐나가게 하라’는 픽사의 여섯 번째 원칙도 좋아한다. ‘머릿속에 떠오른 첫 번째 아이디어를 버려야 한다’는 열 두 번째 원칙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모든 초고는 쓰레기다’라는 말만큼이나 유용하다. 하지만 역시 가장 좋아하는 건 픽사의 스토리텔링 제1의 원칙이다.

‘캐릭터의 성공보다는 캐릭터가 ‘도전’하고 ‘노력’하는 것을 중요시해라!’

내게 픽사의 22가지 스토리텔링 원칙을 준 건 5년 전, 모 텔레비전 드라마 PD였다. 당시, 나는 드라마 대본을 3회까지 써놓고, 완전히 길을 헤매는 중이었다. 스토리는 점점 산으로 갔고, 캐스팅은 난항을 겪었으며, 대본 4개를 쓰는 데 내 몇 년치 에너지를 다 써버린 기분이었다. 결과에 대해 묻지 마시라. 5년 전 그 프로젝트가 성공했다면, 나는 대단한 배우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16부작 드라마의 작가가 됐을 테니까. 1년 넘게 헌신한 그 일은 쫄딱 망했고, 마음은 너덜너덜해졌다. 그런데 지금 왜 나는 이런 얘기를 쓰는 걸까. 중요한 건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를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금 더 소중한 건 ‘인간은 구체적인 실패에서 가장 많이 배운다!’라는 사실이 내겐 보다 확실해졌다는 점이다.

영화 '니모를 찾아서'(2003) 속 주인공 니모를 파스텔로 그린 '현장 학습'.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제공
영화 '니모를 찾아서'(2003) 속 주인공 니모를 파스텔로 그린 '현장 학습'.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제공

내 평생 크게 네 가지 정도의 직업이 있었다. 카피라이터나 서점 직원, 기자처럼 대개 ‘글을 쓰고 책을 소개하는 일’이긴 했지만, 가끔 ‘팀 작업’을 하기도 했다. 나는 드라마를 쓰며 내가 협업에 능숙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웹소설을 연재하면서 알게 된 건 ‘요즘 사람들은 긴 글을 읽지 않는다’는 말이 선입견일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웹소설은 원고지 매수가 아닌 글자 수로 한 회 분량을 결정한다. 8,000자가 넘지 않는 원고를 사람들은 손가락 터치 몇 번으로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소설이 ‘길어서’가 아니라 ‘짧아서’ 항의를 받기도 하는 것이다. 이로써 모바일 플랫폼은 긴 글을 읽기에 부적합하다는 내 편견 하나가 깨졌다. 분량을 알아채는 사람들의 감각 역시 이전의 종이책과 달라졌다.

결국 일에 관해선 나는 편하게 사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호기심은 자주 익숙함을 이겼다. 덕분에 나는 ‘성공’보다 많은 ‘실패의 리스트’를 가지게 됐다. 내가 얼마나 자주, 많이, 망했는지 쓰다 보면 페이지가 모자랄 정도다. 얼마 전, 나는 심야 라디오 방송의 DJ가 되었다. 두렵고 떨리는 일이었지만 오래된 내 꿈을 이뤄보기로 했다. 그러므로 나는 ‘용기’가 단단한 말이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용기란 무모함과 달라서, 두려움 속에서 기어 나오는 힘이라는 것도.

오랫동안 내가 픽사의 주인공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뒤늦게 깨달았다. 그들이 타고나길 용감해서도, 대단히 영웅적이라서도 아니다. 어딘가 모자라거나, 지나치게 늙거나, 소외되었던 이들이 자신의 꿈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이 나를 늘 이끌었던 것이다. 픽사의 스토리텔링 법칙에 유독 이끌렸던 건, 그 원칙이 만드는 캐릭터 자체의 매력에 있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작가는 글을 쓰는 사람이지만 어느 순간 자신이 쓴 문장 속을 걷거나, 살아낼 수도 있다는 걸 조금씩 알게 된 것이다.

픽사의 스토리텔링 법칙 마지막 22번은 이것이다.

‘내 스토리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것을 알고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길고 긴 스토리를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중요하다.’

작업 중 길을 잃고 헤맬 때, 나는 가끔 픽사의 마지막 법칙을 소리내어 읽는다. 그것은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작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어쩌면 나 자신에게 되묻는 말일 수도 있겠다. 내 삶의 본질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으로 구성된 물질인가. 아직 한 줄의 문장으로 나를, 내 작품을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문장 안에 마땅히 있어야 할 몇 개의 단어는 알 것 같다. 성장, 사랑. 그것이 무엇이든 나를, 작품을, 성장시키는 것을 나는 사랑하고 싶다는 것. 여전히, 아직은. 아직까지는…

백영옥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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