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혜미 기자

고가혜
인턴기자

등록 : 2017.11.15 10:00
수정 : 2017.11.15 18:37

“어떻게 하게 된 공부인데…” 82세 장일성 할머니의 특별한 수능

등록 : 2017.11.15 10:00
수정 : 2017.11.15 18:37

지난 8일, 서울 마포구 염리동의 일성여중고교에서 장일성 할머니가 중국어 수업을 듣고 있다. 고가혜 인턴기자

“니 취 판러마! 이건 아무리 봐도 욕 같단 말이야.”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을 일주일 남짓 앞둔 고3 교실의 중국어 수업 시간, 한 학생의 말에 교실은 ‘깔깔깔’ 웃음소리로 가득하다.

발랄한 모습이 마치 10대 여고생 같지만, 특이한 점은 자리에 앉은 학생들의 머리카락 색이 희끗희끗하다는 것. 학생들은 세월의 궤적이 주름에 남은 손으로 연필을 쥐고 수업 내용을 한 글자씩 꾹꾹 눌러 공책에 적는다. 지난 8일, 서울 마포구 염리동에 위치한 여성 만학도가 다니는 일성여자고등학교의 3학년 4반 교실 풍경이다.

항상 교실 맨 앞자리를 차지하는 장일성(82) 할머니는 모두가 인정하는 모범생이다. 영어 교과서 본문에는 행간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필기를 받아 적고, 수학 시간엔 '등차수열'의 합도 공식을 이용해 그럴 듯하게 풀어낸다. 이번 수능에는 국어, 영어, 한국사, 한문 등 도합 네 과목에 응시한다. 수능을 코앞에 두고 주요 과목에 힘을 쏟을 법도 한데, 시험 과목이 아닌 컴퓨터 실습과 중국어 회화 수업도 절대 소홀히 하지 않는다. '배움' 자체가 간절했던 장 할머니에게 중요하지 않은 과목이란 없다.

장 할머니는 하루 4시간 남짓 되는 수업을 위해 왕복 4시간을 들여 매일 경기 남양주에서 학교까지 통학한다. 토요일은 선택 수업인데도 한 번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뜨거운 학구열을 자랑한다. 젊은이에게도 쉽지 않은 수험생활이 고될 법도 한데, 장 할머니는 커다란 배낭을 메고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는 수고를 감수한다. 오후 9시, 늦은 시각 집에 도착해서도 장 할머니는 "어떻게 하게 된 공부인데, 대충 할 수 없다"며 공책을 꺼낸다.

장 할머니가 중국어 회화 수업을 들으면서 수업 내용을 받아쓰고 있다. 고가혜 인턴기자

한창 공부할 10대에 일제강점기를 겪고, 이윽고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배움의 시기를 놓쳤다. 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글도 못 읽는 이에게 의학 공부는 언감생심이었다. 스물둘 어린 나이에 결혼한 뒤로도 가족을 챙기느라 학교는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러다 자식을 다 키우고 일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 공부에 대한 열망 하나로 남편 몰래 3개월 동안 초등학교에 다녔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은 “왜 진작 말하지 않았느냐”며 고등학교 입학 원서를 직접 써줬다. 장 할머니는 지난 8년 동안 가족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초중고 교육과정을 모두 밟아 ‘대한민국 공식 고3’이 됐다.

'늦깎이 수험생'이지만 시험에 응시하는 태도는 사뭇 진지하다. 이번 수능은 8년간 그의 노력이 헛되지 않은 것임을 보여주는 첫 시험대이기 때문이다. 든든한 지원군이던 남편은 아내의 대학 입학을 보지 못하고 지난해 혈액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장 할머니는 도전을 포기하지 않고 희망 대학의 식품영양학과 수시 모집에 응시해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젊은 날, 식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오랫동안 식당에서 일하면서 한식과 양식에 관심이 생긴 터다. 손주뻘 학생들과 18학번 새내기로 캠퍼스에서 만나고 싶다는 장 할머니는 “꿈을 포기하지 않은 이 늦깎이 동료를 보면서 수험생들이 힘을 냈으면 좋겠다”며 59만여명 수능 응시생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장 할머니가 학교 수업이 끝난 후 집에 돌아와 수능 공부에 집중하고 있다. 연합뉴스

장 할머니와 일성여고 3학년 4반 학우들이 즐겁게 수업에 참여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혜미 기자 herstory@hankookilbo.com 고가혜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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