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김정현 기자

등록 : 2018.03.13 04:40
수정 : 2018.03.13 07:25

책값으로 두툼한 돈봉투… 선거 앞 ‘편법 출판기념회’ 봇물

선거자금 통로 악용, 참석자는 ‘눈 도장’

등록 : 2018.03.13 04:40
수정 : 2018.03.13 07:25

이달 15일부터 금지… 막판 러시

동료의원이 나서 노골적 모금

책값 수십만원 내고 빈손 귀가도

청탁금지법도 근본적 해결 못해

‘無모금함 북콘서트’ 자정노력도

지난주 경기도에서 열린 한 지방선거 예비후보의 출판기념회. 중년 남성이 행사장 입구에서 ‘책값으로 얼마를 내면 되느냐’고 묻자, 여성 판매원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다섯 손가락을 펼쳐 보이면서 손을 위아래로 흔들었다.이에 남성은 두툼한 지갑에서 5만원 권 10여장을 꺼내 봉투에 담더니 소속과 이름을 적고서는 모금함에 넣었다. 하지만 책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이 남성은 빈손으로 돌아갔다.

6ㆍ13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치권의 출판기념회가 봇물 터지듯 열리고 있다. 출판기념회가 금지되는 15일이 다가오면서 예비후보들은 막판 본전을 뽑으려는 듯 앞다퉈 대열에 동참하는 분위기다. 당사자들은 선거 정책과 후보자 자신을 알리는 효과적인 홍보수단이자 유권자와의 소통수단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포장하지만, 출판기념회는 선거자금을 끌어 모으기 위한 음성적 통로로 변질된 지 오래다. 행사에서 벌어들이는 수익은 정치자금에 해당하지 않아 신고 의무가 없기 때문이다.

책값은 무늬일 뿐, 정가의 몇 배를 더 내더니 눈도장만 찍고 사라져

6일 오후 3시 경기 수원시 경기도경제과학진흥원에서 자유한국당 소속 경기지사 예비후보 박종희 전 의원의 출판기념회가 열리고 있다. 300여명이 들어찼던 행사장이 1시간 만에 썰물 빠지듯 사라져 50여명만 남아 있다. 김정현 기자

6일 오후 3시 자유한국당 소속 경기지사 예비후보 박종희 전 의원의 출판기념회가 열린 수원시 경기도경제과학진흥원. 행사장 밖 로비에 서 있는 10여명의 판매원은 테이블에 책을 어깨 높이까지 잔뜩 쌓아놓고 참석자들을 맞느라 분주했다. 책 한 권의 정가는 1만5,000원. 하지만 정장 차림으로 줄지어 늘어선 남성 10여명 가운데 거스름돈을 돌려받거나 1만원 권을 꺼내는 경우는 볼 수 없었다. 책 2권을 사면서 5만원 권 2장을 봉투에 넣은 자영업자 김모(50)씨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돈을 내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만, 돈을 얼마든지 더 내는 것은 상관이 없다”고 했다. 언뜻 보기에도 버거울 정도로 양손에 수십 권의 책을 들고 가는 참석자들도 눈에 띄었다.

상당수 참석자들은 책값을 내고 나선 행사장에는 들어가보지도 않고, 할 일을 다했다는 듯 금세 로비를 빠져나갔다. 건설업에 종사하는 박모(53)씨는 “이곳에 온 건 일종의 보험이나 마찬가지”라며 “사람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일단 눈도장은 찍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300여명이 들어찼던 행사장은 1시간가량 축사 릴레이가 끝난 뒤 저자와의 본격적인 토크 콘서트가 시작되자 청중이 썰물 빠지듯 사라지면서 고작 50여명만 남아 휑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여당 정치인 행사엔 국회의장부터 원내대표까지 총출동

6일 오후 5시 인천 부평구 삼산월드체육관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소속 인천시장 예비후보 김교흥 전 국회 사무총장의 출판기념회가 진행 중이다. 이날 행사에는 정세균 국회의장, 우원식 원내대표 등이 총출동했다. 정혜지 인턴기자

같은 날 오후 5시 인천 부평구 삼산월드체육관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소속 인천시장 예비후보 김교흥 전 국회사무총장의 출판기념회. 여권의 장관급 출신 인사답게 행사장에는 정세균 국회의장, 우원식 민주당 원내대표 등 중량감 있는 정치인들이 총출동해 지원사격에 나섰다. 정치인의 인맥이 화려할수록 책값 봉투가 더 두툼해진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 ‘여당 프리미엄’을 입증하듯 이날 출판기념회에는 5,000여명(주최 측 추산)이 운집했다.

공직선거법상 출판기념회에서 예비후보의 당선을 도모하는 행위는 원칙적으로 금지된다. 하지만 축사와 선거운동을 무 자르듯 구분하기에는 모호한 구석이 많다. 이날 축사에서도 “김 전 사무총장의 큰 행보가 좋은 결실로 이어지길 바란다”는 덕담이 나왔다. 이날 행사장에선 동료 의원이 직접 나서 책값 이상의 후원금을 노골적으로 요청하는 경우도 목격됐다. 한 여당 의원은 “정가가 1만5,000원인데, 비스듬하게 보면 15만원, 더 비스듬하게 보면 150만원”이라고 직접 총대를 멨다. 객석에 앉아 있던 원모(70)씨는 “이게 모두 정치자금 모으려고 하는 것 아니냐”며 “다 알지만 그래도 도와주러 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 보면 여기 온 것 같아요?” 야당도 현역은 프리미엄

9일 인천시 연수구 선학체육관에서 열린 유정복 인천시장의 출판기념회에 수많은 인파가 몰렸다. 김정현 기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어쩔 수 없이 출판기념회를 찾은 참석자들은 도처에서 접할 수 있었다. 지난주 한 야당 현역 지자체장 출판기념회에서 만난 박모(53)씨는 행사장 입구에서 일면식도 없는 기자에게 행사장을 배경으로 인증샷을 찍어 달라고 요청했다. 스마트폰으로 찍은 사진을 확인하는 박씨에게 ‘왜 사진을 찍느냐’고 묻자, “구청에서 운영하는 모임에서 왔는데 혹시나 나중에 책임자가 참석 여부를 확인할 때 이 사진을 보여주면 된다”는 답이 돌아왔다.

야당이라도 현직 시장은 ‘현역 프리미엄’을 톡톡히 누리는 모습이었다. 지난 4년간 쌓아온 조직력과 높은 인지도 덕분일 것이다. 이날 출판기념회는 시작 1시간 전부터 인파가 밀려와 행사장 앞 로비를 가득 메우면서 책을 사기 위해 수십 미터씩 줄을 서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그렇게 한동안 기다려 돈봉투를 내밀고 나면 다음에는 행사에 출석했다는 사실을 확실히 남기는 게 중요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만 아는 ‘약어’로 출석도장을 대신했다. 회사원 김모(34)씨는 방명록에 주소를 모두 적지 않고 ‘남구(南區)’라고만 적었다. 의아해서 물었더니 “그렇게 적어도 다 아신다”면서 “상급자가 한 번 가보라고 해서 외출 신청을 하고 왔다”고 답했다.

따가운 눈총 의식해 모금함 없는 출판기념회도

9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한남동 블루스퀘어 북파크에서 진행된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참석자들이 책을 구입하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 강유빈 기자

선거를 앞둔 정치인이 출판기념회를 열어 음성적으로 후원금을 거두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일부 유력 정치인은 책 판매를 통해 억대의 정치자금을 모은다는 얘기가 정설이다. 이에 따라 정가 판매 외의 모금행위 금지 등 여러 규제 법안이 성안됐지만, 국회에서 번번이 발목이 잡히고 있다.

정치인의 갑질 행태에 대한 여론의 눈총이 따갑자 최근에는 북 콘서트 형식으로 출판기념회를 열어 책 판매를 강제하지 않는 자정 노력도 조금씩 생겨나고 있다. 9일 저녁 서울 용산구 한남동 블루스퀘어 북파크에서 진행된 박영선 민주당 의원의 출판기념회에서는 돈봉투가 담긴 모금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소속과 이름을 적은 돈봉투를 들고 온 몇몇 참석자들은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일부는 “의원님께 드릴 봉투를 대신 받아줄 수 없냐”고 물었지만, 책 판매 부스를 지키고 있던 판매원은 “그런 것은 준비가 안 돼 있다”며 정중히 거절했다.

북 콘서트 행사는 서점에서 기획하기 때문에 체육관이나 컨센션홀에서 수천명씩 초청하는 기존의 출판기념회 형태로는 치를 수 없다. 이날 박 의원의 북 콘서트도 400여명 규모의 소극장에서 진행됐다. 일부 참석자들은 교양프로그램 방청객이 된 듯 수첩을 꺼내 메모했고, 적지 않은 인원이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눈도장만 찍고 행사장을 빠져나가는 참석자도 다른 출판기념회에 비해 드물었다. 박 의원 측은 “절대로 뒷말이 안 나오게 조심하려고 일부러 책 판매와 행사 진행을 철저하게 분리했다”고 설명했다.

국민권익위원회는 최근 정치인 출판기념회 문제가 커지자 이에 대한 유권해석을 발표했다. 권익위에 따르면 지자체장이나 현역의원, 언론인 등은 부정청탁금지법 적용 대상이지만, 비공직자는 청탁금지법 제재 대상이 아니다. 또 공직자가 출판기념회를 하더라도 정가의 책값을 받으면 청탁금지법 제8조 3항 3호 ‘정당한 권원(權原)에 의해 제공되는 금품’에 해당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권익위는 직무 관련이 있는 사람으로부터 ‘의례적인 범위’를 넘는 책값을 수수한 경우에는 청탁금지법에 어긋난다고 밝혔으나 그 기준이 모호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청탁금지법도 정치인 출판기념회의 탈선을 막을 근본 대책은 되기 어렵다는 얘기다. 결국 의식 있는 정치인들이 힘을 모아 더 늦기 전에 스스로 출판기념회를 규제하는 입법에 나서야 한다.

김정현 기자 virtu@hankookilbo.com

강유빈 기자 yubin@hankookilbo.com

정혜지 인턴기자(고려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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