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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석학 칼럼] 유럽에는 이민이 필요하다

입력
2015.09.20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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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으로 황폐해진 중동에서 온 난민들이 독일에 도착하자 환영 피켓을 들고 반기는 모습은 얼마나 가슴 따뜻하게 하는가. 독일은 전쟁과 약탈을 견뎌낸 사람들, 짓밟히고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새로운 약속의 땅이다. 독일에서는 아주 대중적인데다 그다지 자선을 베풀자는 성향이 아닌 타블로이드 신문마저 기꺼이 난민을 돕자고 한다. 영국과 다른 나라의 정치인들이 시리아, 리비아, 이라크, 에리트레아 난민의 두 팔을 비틀며, 이들이 비록 소수일지라도 들어올 경우 왜 사회에 치명적인 위험이 되는지 설명하는 동안 ‘마마 메르켈’은 독일이 모든 순수 난민들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약속했다.

올해 대략 80만명의 난민이 독일에 입국할 전망이다. 반면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3만명도 채 안 되는 망명 신청에 호들갑을 떨면서 “사람 떼”가 북해를 넘고 있다고 위협조로 경고했다. 메르켈과 달리 캐머런은 수백만 명의 삶을 고통스럽게 만든 리비아 전쟁을 부채질한 부분적인 책임이 있다. 메르켈이 난민 쿼터제를 의무적으로 실시하자면서 다른 유럽 국가들에게 더 많은 난민을 받아들이도록 요구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정치인들이 구사하는 근심 가득한 수사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사실 독일보다 더 많은 인종이 섞인 곳이고 어떤 면에서는 훨씬 개방적인 사회다. 런던은 베를린이나 프랑크푸르트에 비해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국제도시다. 또 대체로 영국은 이민자들로부터 큰 수혜를 받았다. 실제로 영국 국민건강보험은 이민자가 줄어들 경우 병원 일손이 심각하게 부족한 상황이 생길 것이라고 경고했다.

지금 독일의 분위기가 예외적일 수는 있다. 난민이나 이민자를 받아들이는 정책이 정치적으로 대중에게 인기 있었던 적은 없다. 1930년대 후반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유대인들이 생명에 위협을 느꼈을 때 부자 나라인 미국을 포함해 매우 적은 나라들만이 약간의 난민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었다. 영국은 마지막 순간이던 1939년이 돼서야 약 1만명의 유대인 어린이들을 받아들였는데 그것도 영국 내에 후원자가 있거나 부모를 영국 밖에 두고 혼자 와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현재 독일의 관대한 분위기가 과거 독일의 살인적인 행위와 관련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을 과소평가하려는 게 아니다. 일본 역시 역사적 범죄의 짐을 지고 있지만 조난당한 외국인을 대하는 일본인들의 태도는 독일에 비해 훨씬 냉담하다.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도 많은 독일인은 여전히 과거의 역사를 통해 배운 것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 한다.

하지만 정치인들과 미디어가 독점하다시피 한 최근의 난민 위기에 대한 시각 때문에 이주와 관련한 좀더 폭넓은 쟁점들이 가려지고 있다. 바다에서 표류하는 난민 가족은 탐욕스러운 밀수범과 갱단의 먹잇감이 되기 쉽다. 그들의 비참한 모습은 매우 쉽게 연민과 동정(독일에서뿐만 아니라)을 불러 일으킨다. 하지만 일자리를 찾고 새로운 인생을 살기 위해 유럽 국경을 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난민인 것은 아니다.

영국의 관리들이 2014년 영국 출국자보다 입국자가 30만명 이상 많았다면서 “아주 실망스럽다”고 말했을 때, 그들이 지칭한 건 망명 신청자들이 아니었다. 새롭게 영국에 온 사람들은 대부분 폴란드나 루마니아, 불가리아처럼 유럽연합(EU) 내에서 온 이들이었다. 일부는 유학 때문에 들어오고 일부는 일을 찾아서 들어온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온 게 아니라 더 나은 삶을 위해 온다. 망명 신청자를 경제적 이주자와 함께 묶어버리는 건 그들이 마치 범법의 위험을 뚫고 들어오기 위해 애쓰기라도 했던 것처럼 폄하하며 그들의 명예를 깎아 내린다.

EU 내부에서 온 사람이든 외부에서 온 사람이든 경제적 이주자라면 자신보다 상대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이 내는 세금에 의지해 살려고 온 가난한 사람일 것이라고 흔히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 경제적 이주자가 남에게 빌붙어 먹고 살려는 사람은 아니다. 그들은 일하고 싶어한다. 경제적 이주자를 받아들이는 나라가 얻는 혜택을 알아차리긴 어렵지 않다. 경제적 이주자는 대체로 원주민보다 임금을 덜 받으면서도 더 고되게 일한다. 이런 것이 분명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되는 건 아니다. 값싼 노동력이 사회에 주는 혜택을 꼬집어 말한다고 해서 임금 삭감 위기에 있는 사람들까지 설득하진 못할 것이다. 어떤 경우든 경제적 이주자를 받아들이자고 하는 것보다는 난민에 동정심을 갖자고 말하는 게 쉬운 일이다. 그건 독일도 마찬가지다.

2000년 게르하르트 슈뢰더 당시 독일 총리는 대부분 인도인이었던 2만명의 해외 첨단기술 전문가들에게 취업비자를 주려고 했다. 독일은 그들을 몹시 필요로 했다. 하지만 슈뢰더는 즉각적인 반대에 부딪혔다. 어떤 정치인은 “인도인들 대신 아이들”이라는 슬로건을 내놓기도 했다. 대부분의 부유한 나라들처럼 독일의 출산율은 낮다. 이런 지역들에서는 할 사람이 없든, 그들이 하기 싫어하든 이유야 어떻든 간에 어떤 일을 해낼 젊은 힘과 기술을 갖춘 이민자가 필요하다. 모든 국경을 모두에게 열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난민 쿼터제에 대한 메르켈의 생각은 경제적 이민자에게도 적용돼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EU는 이주자에 대해 일관적인 정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EU 소속 시민들은 그 안에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영국은 이걸 막으려 하지만 성공할 것 같진 않다). 세심한 관리 속에서 EU로 오는 비EU 출신 경제적 이민자는 적법하고 동시에 EU에 긴요하다. 이주자들이 유럽인들의 동정심을 살 만해서가 아니라 유럽이 그들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쉽지는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합리적인 사익(私益)에 대한 냉정한 계산을 따르기보다 상황에 휩쓸려 대량학살을 저지르거나 따뜻한 공감을 표시한다. 그들은 감정에 더 쉽게 지배되기 때문이다.

이언 부르마 미국 바드칼리지 교수

번역=고경석기자 ⓒProject Syndic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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