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조태성 기자

등록 : 2018.01.29 04:40
수정 : 2018.01.29 14:01

“팜므 파탈엔 자본가 탐욕이 녹아 있어요”

'범죄소설의 계보학' 내놓은 계정민 교수

등록 : 2018.01.29 04:40
수정 : 2018.01.29 14:01

범죄물 속 팜므 파탈 분석 결과

“대중의 적개심이 여성에 투사

性 아닌 경제 범주로 접근해야”

“어떤 사회가 숨기고 있는 모순

범죄소설에 오롯이 담겨 있어”

영화 ‘간기남’(2012)에서 팜므 파탈로 변신한 배우 박시연. 계정민 교수는 '범죄소설의 계보학'에서 팜므 파탈을 성적 매력이 아니라 자본가의 탐욕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기존 젠더 규범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로 페미니스트들은 ‘팜므 파탈’을 ‘전복적 여성’, ‘해방적 여성’이라 평가합니다.

그런데 팜므 파탈은 오히려 ‘탐욕스러운 자본가 이미지’이고, 그렇기에 잔혹하게 제거되는 희생양이라 봐야 합니다.”

28일 범죄소설의 역사를 추적한 ‘범죄소설의 계보학’(소나무)를 내놓은 계정민 계명대 교수의 설명이다. 요염한 표정에 빨간 입술, 풍만한 가슴에 쭉 뻗은 다리. 범죄물에 등장하는, 성적 매력으로 남자를 낚아다 파멸에 이르게 하는 팜므 파탈의 전형적 모습이다. 고전적인 해석은 ‘여성=섹스=죽음’이란 공식이었다. 멀쩡한 남자를 잡아먹는 ‘성적인 식인종’이자 ‘성적인 포식동물’이 팜므 파탈이다.

범죄물 속 팜므 파탈에 대한 이런 해석을 뒤집은 건 페미니스트들이었다. 전통적인 여성상에서 벗어난 해방된 여성,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여성이라 해석했다. 여성도 성에 대한 얘기를 거리낌 없이 늘어놓고, 자유자재로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으면서 이런 새로운 해석이 등장했다.

계 교수는 하지만 팜므 파탈을 ‘성적인 범주’보다 ‘경제적 범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팜므 파탈을 등장시키는 하드보일드 소설가 레이먼드 챈들러, 제임스 케인, 대실 해밋 등의 작품 분석을 통해 팜므 파탈이 성적 쾌락보다는 오로지 돈을 위해 남성에게 접근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팜므 파탈은 침실보다 사무실에 더 오래 머물고, 브래지어보다 주식을 더 신중하게 고른다. 계 교수는 “팜므 파탈은 돈을 불리는 일에 탁월하고 언론, 경찰, 권력자 등 기성 권력과 제휴하는 데도 거리낌이 없다”면서 “이런 팜므 파탈의 특성에는 부패한 자본가에 대한 대중들의 혐오 감정이 고스란히 다 녹아 있다”고 말했다.

그렇기에 범죄물 속 팜므 파탈이 맞이하는 ‘비참한 최후’는 페미니스트들이 말하는 것처럼 여성들이 이뤄낸 정치적 권력, 경제적 부, 사회적 성취에 대한 남성들의 시기, 질투, 두려움 때문이 아니다. 계 교수는 범죄소설 속에서 대개 자본가 계급은 건재한 반면 팜므 파탈은 가혹한 응징을 당하는 데, 이런 구도는 “자본가에 대한 대중의 적개심을 여성에게 투사해서 집행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팜므 파탈은 자본가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수단이다. 기존 체제와 타협하는 제사상에 올려지는 희생물이 팜므 파탈이라는 것이다.

이런 독특한 해석을 내놓은 ‘범죄의 계보학’은 계 교수가 범죄소설을 10여년간 연구한 성과를 모아둔 책이다. 작품성이 낮다는 이유로 무시되어온 범죄소설을 국내 연구자가 분석한 희귀 사례이기도 하다.

계 교수의 관심도 처음엔 19세기 영국문학이었다. 그러다 19세기 영국의 범죄소설, 뉴게이트 소설을 접하면서 의문이 일었다. 찰스 디킨스 같은 작가가 쓴 사회문제 소설은 고전이 됐는데, 그에 못지 않은 문제의식을 품고 있으며 1830~40년대 가장 인기를 끌었던 뉴게이트 소설은 왜 잊혀졌을까. 문학성이 낮고 폭력적이라서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급진적이어서다. 계 교수는 뛰어난 지배계급 남성이 문제를 해결하는 셜록 홈즈 류의 추리소설을 ‘우파 범죄소설’로, 뉴게이트와 하드보일드 소설처럼 급진적 폭력이 난무하는 범죄 소설을 ‘좌파 범죄소설’로 구분해 설명하고 있다.

계 교수가 범죄 소설 연구에 집중한 건 범죄소설이야 말로 한 사회가 숨기고 싶어하는 계급, 인종, 민족간 모순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갈등의 최전선이라 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영화만 봐도 검사, 형사, 권력기관, 폭력배들이 나와 얽히고 설킨 관계를 만들어 투닥대는 ‘누아르’ 작품들이 많다. 우리나라가 안고 있는 여러 모순에 대해 민감하게 여기는 이들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다. 그런 곳에서야 말로 범죄소설이 많이 생산되고, 또 많이 연구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책을 내면서 띠지에다 ‘범죄소설에 문학적 시민권을!’이란 문구를 적어 넣은 이유이기도 했다.

범죄소설 연구서 '범죄소설의 계보학'을 내놓은 계정민 교수. 여러 사회갈등이 내재한 한국이야 말로 범죄소설 연구의 최적지일 수도 있다. 계정민 제공

계 교수는 “영미문학계도 오랫동안 범죄소설을 일종의 ‘길티 플레져(Guilty Pleasureㆍ떳떳하지 않지만 즐거운 일)’로 취급했는데, 1990년 북미최대학술단체 현대어문학회(MLA)가 범죄소설을 다루면서 범죄소설을 주제로 한 박사 논문이 나오는 등 문학계에서 시민권을 얻었다”면서 “한국도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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