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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 과거사, '믿지 말라, 미국'

입력
2015.04.19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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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미국 유명 출판사에서 펴낸 역사 교과서가 있다. 1,200여 페이지에 달할 정도로 두꺼운 이 책은 인류의 기원부터 동ㆍ서양의 역사를 고대부터 불과 몇 년 전 현대사까지 소개하고 있다. 한국 교과서에는 찾아보기 힘든 오세아니아(호주ㆍ뉴질랜드ㆍ남태평양 제도) 지역까지 다룰 정도로 내용이 충실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한국과 한반도의 과거사에 대해서는 적잖은 오류가 있다. 자존심 상하지만, 미국에서 출간되는 많은 책들이 ‘동해’ 대신 ‘일본해’로 적는 게 현실이므로 그건 문제삼지 않기로 한다.

우선 고구려 백제 신라가 솥발처럼 일어서 만주를 주름잡고 중국 침략자를 물리쳤던 우리 민족 고대사가 송두리째 빠져 있다. 신라만 있을 뿐 만주를 호령하고 수나라 100만대군을 물리친 고구려는 언급도 없다.

이 교과서는 신라의 삼국통일을 이렇게 적고 있다. “당나라 군대가 한국 땅 대부분을 정복했다. 그러자 토착 국가 신라가 나서, 당이 한반도 전체를 차지하지 못하도록 대응했다. 장기간의 소모전을 원치 않았던 두 나라는 정치적으로 타협했다. 당나라는 한국에서 철수하고, 신라는 당의 제후 국가를 자처했다.”

11, 12세기 송(宋)ㆍ거란(契丹)사이에서 동아시아의 세력 균형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고려는 더욱 초라한 대접을 받는다. 거란이 한반도 북부를 지배했다는 설명도 거슬리지만,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지도는 아예 한반도가 여진족 금나라에 완전 정복된 것으로 표시됐다. 게다가 15세기 이후 동양사 부분에서는 중국과 일본만 다룰 뿐 조선 왕조는 언급조차 없다.

이쯤 되면 독자들께서는 ‘부실한 미국 교과서의 정체가 뭐냐’는 의문이 드실 것이다. 놀라지 마시라. 바로 맥그로힐 출판사의 ‘전통과 교류: 과거에 대한 국제적 관점’(제3 개정판)이다. 기억이 희미한 일부 독자를 위해 설명을 덧붙이자면, 2차 세계 대전 중 일본군의 위안부 동원 만행을 기술해 우리에게 유명해진 그 책이다. 일본 정부가 교과서 수정을 요구했다가 집필자와 출판사로부터 퇴짜 맞았고,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지난 2월 ‘감사 편지’를 보낸 바로 그 책이다.

지난 몇 개월간 한국인이 ‘우리 편’이라고 느꼈던 이 책의 오류를 소개한 건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처럼 위안부 기술을 트집 잡으려는 이유는 물론 아니다. 객관적 증거가 명확한 현대사 영역의 반인륜적 범죄와 1,500년전 동아시아 역사에 대한 오류를 같은 반열에 놓을 수는 없다.

일본 제국주의 만행을 준엄하게 기록하지만, 한국사도 제대로 기술하지 않은 이 책은 한일 두 나라의 과거사 갈등에서 미국이 한국을 도울 거라는 기대는 부질없는 희망에 가깝다는 걸 보여준다. 우리 한국 사람은 독도ㆍ위안부ㆍ일본 침략을 한 덩어리로 생각하지만, 맥그로힐 교과서로 배워 한국 역사와 한국인의 정서를 모르는 미국은 위안부 문제만 전시 ㆍ여성인권 이슈로 다루려는 경향이 강하다.

지난 16일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일 외교차관 협의회에서 ‘일본은 과거사를 직시해야 한다’는 조태용 차관 발언에 대해, 사이키 아키타카 차관이 “일본은 역사를 정면으로 직시하고 있다. 아베 총리는 공개적으로 과거사에 대한 견해를 표명해 왔다”고 맞서는 걸, 토니 블링컨 부장관이 “한일 양국이 직면한 공통의 목표가 현존하는 갈등을 훨씬 압도할 것”이라고 사실상 일본을 두둔한 것 역시 우연이 아니다.

해방 직후 ‘미국을 믿지 말고, 소련에 속지 말라. 일본 일어선다’는 노래가 유행했다. 다른 분야는 모르겠지만 우리 민족의 불행했던 현대사를 인식하는 것과 관련, ‘미국을 믿지 말라’는 70년 세월을 관통하는 경구(警句)로 남아 있다.

조철환 워싱턴특파원 ch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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