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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위르겐 힌츠페터(7월 6일)

입력
2017.07.06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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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광주 항쟁의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 자료사진
1980년 광주 항쟁의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 자료사진

1980년 광주항쟁을 기록한 시민들의 역사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 광주항쟁을 구성한 세 주체로 광주 시민과 계엄군, 그리고 외신을 꼽았다. 왕래는 물론이고 언로마저 차단된 격절의 섬 광주 시민들에게, 곁에서 지켜보고 본 바를 그대로 전달하는 언론, 외신의 존재가 그렇게 컸다. 물론 그 시기 그 일은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들 중 한 사람, 독일(당시 서독) 제1공영방송 ARD 동아시아 특파원 위르겐 힌츠페터(Jurgen Hinzpeter, 1937~2016)가 있었다.

그는 녹음을 담당하는 동료기자와 함께 공수부대가 투입된 다음날인 19일 서울을 거쳐 계엄령 하의 광주에 잠입했다. 외국회사 주재원이라며 신분을 속이고 군 검문을 통과한 그는 계엄군의 곤봉과 대검 학살, 21일 전남도청과 전남대 발포 현장을 취재한 뒤 필름을 허리띠에 감춘 채 광주를 빠져 나와 그 필름을 도쿄를 거쳐 독일 방송국 본사로 전송했다. 광주항쟁의 현장 영상이 세계 최초로 22일 저녁 서독 전역에 방영됐다.

힌츠페터는 23일 다시 광주로 잠입, 코뮨을 방불케 한 시민 자치 하의 광주의 이야기를 사실상 유일하게 영상에 담았고, 그 영상이 9일 ‘기로에 선 한국’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로 제작ㆍ방영됐다. 다큐멘터리는 유학생 등을 통해 은밀히 국내에 반입돼 80년대 초 대학가와 재야 진영에서 역시 은밀히 상영됐다. ‘시대를 넘어…’는 그들의 기록이 없었다면 “광주 시민의 억울한 희생과 장렬한 투쟁은 ‘존재하지조차 않은 사건’이 되었을지 모른다”고 썼다. 당시 국내 언론은 신문ㆍ방송 할 것 없이 “용공분자들의 무장 폭동”으로 80년 광주 소식을 전했다.

63년 방송사에 입사해 67~89년의 17년 간 동아시아 특파원으로 일한 그는 베트남전쟁을 포함, 냉전기 주요 대치지역 중 한 곳인 동아시아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취재했고, 광주항쟁 취재를 생애 최악(최고)의 기억으로 꼽았다. 86년 11월 광화문 시위 취재 도중 사복경찰에게 구타를 당해 목과 척추 중상을 입기도 했다고 한다. 95년 은퇴했다.

그는 1937년 7월 6일 태어나 2016년 1월 25일 별세했다. 그의 모발과 손톱, 유품 일부는 그 해 5ㆍ18 기념식에 망월동 구묘역(옛 5ㆍ18묘지)에 묻혔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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