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삶과 문화] 명품의 시대, 그 속에서의 진정한 명품

입력
2017.05.24 15:55
0 0

고려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많이 잊혀진 왕조이다. 명분 없는 쿠데타로 조선이 들어서면서 고려는 어떻게든 부정되어야만 하는 왕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는 세계 전쟁사에서 유래가 없는 최강의 군단, 몽고를 1세대 이상 막아내며 자치권을 얻어낸 강국이다. 중국은 물론 동유럽까지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때, 고려는 원나라의 간섭만 받는 원 간섭기 에 독립국의 지위를 유지한다. 이는 고려의 경제력과 군사력 그리고 찬란한 문화가 빚어낸 저력이었다. 이러한 고려의 기상은 우리나라가 오늘날까지도 세계 속에서 ‘코리아’ 즉 고려로 각인되는 결과로 남아 있다.

고려의 탄탄한 경제력에 바탕을 둔 발달된 문화는 역사에 남는 최고의 명품들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고려불화와 나전칠기 그리고 고려청자이다. 명품이란 경제적인 번영 위에서 이루어지는 정신적인 미의식의 완결이다. 지금 우리 기업의 제품 가운데 세계 최고로 꼽힐 만한 것은 드물다. 그런데 고려시대에 우리에게는 극강의 명품이 세 가지나 존재했던 것이다.

고려불화는 정교하고 섬세한 필치와 베일에 싸인 귀족적인 성화(聖畫)의 방정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신품(神品)이다. 이와 달리 나전칠기는 작은 조각이 맵시 있게 나열된 극품(極品)의 위용을 자랑한다. 일제 강점기 조선의 아름다움을 사랑한 야나기 무네요시는 조선의 미를 ‘소박한 비애의 미’라고 정의했다. 그러나 그의 말이 조선의 미감을 관통했을지는 몰라도 고려의 미의식에까지 통용될 만한 것은 아니다. 섬세하고 화려한 고려의 미감은 정교함이 빚어내는 고도로 계산된 성숙한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려명품의 끝에 비색의 상감청자가 존재한다. 중국의 하남성 여주(汝州)에는 송나라를 대표하는 관요(官窯)인 여요(汝窯)가 있다. 관요는 황실과 국가기관에서 사용하는 최고의 도자기를 생산하는 곳이다. 이 여요에 당시 송나라 황제인 휘종은 ‘우과천청(雨過天靑)’ 즉 비 개인 하늘의 푸른빛과 같은 청자를 제작할 것을 요청한다. 황제가 최고로 평가한 청자, 이로써 동아시아에는 청자의 시대가 펼쳐지게 된다.

고려청자의 비색은 비밀의 색(秘色)인 동시에 비취 빛(翡色) 아름다움이었다. 고려청자는 최고의 명품들을 기록한 책인 <수중금(袖中錦)>에서 ‘천하제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서긍을 감탄시키는 것 역시 고려의 청자기술이었다.

그런데 청자의 비색은 중국의 여요에도 존재했던 것으로 고려만의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고려청자의 명성은 어디에서 만들어진 것일까? 그것은 고려가 나전칠기의 기술을 활용한 상감기법을 청자에 적용해 세계 최초로 자기에 문양을 넣는 방식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중국의 흙은 우리보다 입자가 곱다. 때문에 중국 자기들은 빛이 투과될 정도의 얇고 날렵한 아름다움으로 발전한다. 이에 비해 우리의 흙은 입자가 굵어서 투박함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즉 중국자기에 비해서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을 반전시킨 것이 바로 상감청자였다.

당시 자기에 그림과 문양을 그리면 최고가 될 것임은 누구나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를 소성하는 1300° 이상이 되면 모든 안료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이후 코발트와 같은 광물질 안료가 사용되면서 자기의 역사는 청자에서 청화백자로 넘어가게 된다. 바로 이러한 과도기에 고려의 상감청자가 존재하는 것이다.

상감청자는 두꺼운 자기의 표면을 파내고 백토와 흑토를 채워 넣어 무늬를 입힌 자기이다. 이것은 두꺼움이라는 한계를 역으로 활용한 위대한 발상의 전환이었다. 문제점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상황을 반전시키려는 승부사적 기질이 상감청자라는 시대의 명품을 완성시킨 고려의 정신이었던 것이다.

자현 스님ㆍ중앙승가대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