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삶과 문화] 멈춤의 시간

입력
2016.05.26 14:32
0 0

세상이 딱딱 인과의 사슬로만 굴러가는 것은 아닌 듯하다. 전보다는 더 틈과 우연, 공백이 눈에 보인다. 소설을 읽을 때도 작가가 인물이나 이야기를 너무 틀어쥐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 불편하다. 자신이 창조한 허구의 세계일망정, 작가는 인물들과 인물들의 이야기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좋은 문학작품이라면 인간이 가진 불가피한 무지 앞에서 물러설 줄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등불 밝힌 더블린 세탁소’는 윤락 여성의 보호를 위해 개신교단에서 운영하는 기관이다. 마리아라는 40대 여성은 그곳 주방에서 일하며 혼자 살고 있다.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더블린 사람들’(진선주 옮김, 문학동네)에 나오는 ‘진흙’이라는 작품 이야기다. 가난과 무기력이 지배하던 20세기 초 아일랜드 더블린이 배경이다. 만성절 전야(켈트력으로는 섣달 그믐날)의 만찬에 초대받은 마리아는 지금 한껏 들떠 있다. 자신이 유모처럼 키운 조의 집에 가서 송년 모임을 가질 생각에 ‘세탁소’의 저녁 준비를 하면서도 마음은 바쁘기만 하다. 소설에 묘사된 그녀의 용모는 볼품없다. 착하고 수줍기만 한 그녀가 결혼 이야기처럼 당황스러운 화제가 나올 때 보이는 반응은 “코끝이 거의 턱 끝에 닿도록” 웃는 것인데, 사람들의 수군거림 속에서 정형화되었을 그 마녀의 이미지는 그녀의 심성과도, 그녀의 성스러운 이름과도 너무 대조적이다. 그러나 작업복을 벗고 준비해둔 블라우스를 입고 거울 앞에 서자 스스로가 보기에 “아직도 멋지고 깔끔하고 아담한 몸매”이다. 아껴둔 얼마 되지 않는 돈으로 조네 아이들에게 줄 과자를 한 봉지 산 뒤 제과점을 나섰지만, 그녀는 근사한 무언가를 더 사고 싶어 한참을 궁리한다. 다시 제과점에 들어가 건포도 케이크를 한 덩어리 산다. 케이크는 깜짝 선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조의 집에 도착하고 보니 케이크가 없다. 전철에서 자리를 비켜준 뒤 이야기를 걸어오던 술 취한 신사가 생각나지만 알 수 없는 일이다. 조금씩 안 좋은 일들이 만성절 전야의 시간 안으로 끼어든다. 조는 호두까기가 안 보이자 버럭 화를 낸다. 사이가 안 좋은 동생 이야기가 나오자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만성절 전야 놀이에서 이웃집 소녀가 접시 하나에 진흙을 놓아두고(진흙을 집으면 곧 죽게 된다는 속설이 있단다) 마리아가 그걸 집는 바람에 작은 소동이 일어나기도 한다. 조의 부탁으로 마리아는 아일랜드의 유명한 오페라 아리아 ‘내 살고 싶은 곳 꿈꾸었네’를 부르는데 2절을 불러야 할 때 다시 1절을 되풀이 부른다. 가사의 마지막은 이렇다. “그보다 날 더 기쁘게 하는 꿈이 있었으니/그것은 그대의 늘 변함없는 사랑이어라.” 아무도 그녀의 실수를 지적하지 않는다. 사실, 이것이 실수인지도 알 수 없다. 노래를 듣다 자기감정에 겨워진 조의 두 눈에는 눈물이 한가득 차오르고, 흐려진 눈 탓에 이번에는 병따개를 찾을 수가 없다. 소설은 여기에서 끝난다.

한껏 즐거워야 할 마리아의 저녁을 조금씩 흔들어놓는 이 작은 불운, 소동들이란 무엇인가. 생각해보면 그것들은 그냥 언제든 있을 수 있는 일들이기도 하다. 그것들이 마리아의 고단한 삶을 특별히 더 암담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거기에 무슨 암시가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작가는 마리아의 심경을 거의 보여주지 않는다. 작가로서도 어쩔 수 없는 지점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삶의 어떤 광경 앞에서 작가는 가만히 멈추어 서 있다. 우리도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나 머릿속으로 질문과 생각들이 쏟아지고, 가슴속으로 어떤 느꺼움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우리가 공동체의 성원으로서 마땅히 감당하고 지켜나가야 할 윤리라는 게 있을 것이다. 그 윤리를 서로에게 요구하기 전에, 타인에 대한 거리(距離)를 포함하는 이 멈춤의 시간을 스스로에게 요청할 수는 없을까.

정홍수 문학평론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