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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니까 현실에 등 돌릴 수 없다” 교황에 맞서다 교단서 추방

입력
2016.03.12 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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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도 카르데날
/페르난도 카르데날

니카라과의 에르네스토 카르데날(Ernesto Cardenal)과 페르난도(Fernando) 카르데날 형제의 삶은 많이 겹친다. 둘은 가톨릭 사제이자 해방신학자였다.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FSLN) 동지로서 소모사 독재정권과 배후의 미국 정보권력에 저항했고, 혁명 후 다니엘 오르테가 정부의 문화부장관과 교육부장관을 각각 지내며 혁명 공약 이행에 헌신했다.

맹렬한 반공주의자였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사제가 무슨 정치냐’고 질타하자 둘은 ‘사제니까 현실에 등돌릴 수 없다’며 맞섰고, 84년 성직에서 함께 쫓겨났다. 교황청의 성무집행정지 처분이 취소된 것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취임한 뒤인 2014년 8월이었다. 에르네스토는 시인으로 명성을 얻었고, 동생 페르난도는 프레이리언 교육자로 큰 업적을 쌓았다. 변질된 오르테가 정권을 비판하며 산디니스타 혁명정신의 복원을 누구보다 강하게 주장한 것도 그들 형제였다. 9년을 덜 산 동생 페르난도 카르데날이 2월 20일 먼저 별세했다. 향년 82세.

카르데날 형제는 니카라과 서쪽 그라나다의 꽤 풍족한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났다. 1925년생인 에르네스토는 문학을 전공한 뒤 멕시코와 미국 유럽 등지를 돌며 유학했고, 50년 귀국해 FSLN 대변인으로 일했다. 54년 혁명 좌절 후 미국으로 도피, 트라피스트회의 저명한 사제 겸 시인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 아래에서 신학과 문학을 공부한 뒤 사제가 됐다.

동생 페르난도는 1934년 1월 26일 태어났다. 연애를 즐기던 ‘그늘’ 없던 청년이 조국현실에 눈 뜨기 시작한 건 17세 무렵. 그 즈음 귀국한 형의 영향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로욜라 예수회를 통해 사제가 됐고, 산디니스타가 됐다. 소모사 정권 말기의 부패와 폭압에 미국 정부조차 한계를 느끼던 1976년, 그는 미 하원 니카라과 인권침해 실태 조사 청문회에 산디니스타 대표로 참석해 민중들의 저항에 대해 증언했다. “니카라과 시민들은 지금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싸우는 중이다. 나는 유혈 해법을 선호하지 않지만, 소모사 같은 독재자들이 민주주의의 길은 오직 피를 흘려야만 나아갈 수 있다고 믿게 만든다.”(NYT, 2016.2.23) 미국은 독재권력 지원을 끊었고, 3년 뒤 산디니스타 혁명이 성공했다.

사제로서 페르난도의 주업은 빈민 구제, 특히 교육사업이었다. 74년 니카라과 예수회가 해외 원조로 시작한 교육 봉사활동 ‘Faith and Joy(Fe y Alegria)’가 그의 소명이었다. 콜롬비아 메데인(Medellin)의 한 빈민촌에서 본 참담한 실정이 곧 조국의 현실임을 깨달은 뒤였다. 문맹과 무지로부터의 해방은 물론 산디니스타의 혁명 공약이기도 했다. 79년 그가 혁명 정부의 교육부장관이 되던 무렵 니카라과의 문맹률은 50.35%에 달했다.

2014년 7월 미국 조지타운대 버클리센터 인터뷰에서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혁명 정부는 모든 니카라과인이 글을 읽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했고, 그 책임을 내게 맡겼다. 한편 기뻤지만 동시에 두려웠다. 전국적 문맹퇴치 캠페인을 벌일 만한 조직화 경험도 없었고, 예산도 없었다. 혁명에 성공한 지 딱 열흘이 지난 때였고, 혁명 정부는 가난했다.”

대신 혁명의 열정과 기대에 나라 전체가 들려있던 시기였다. 페르난도는 산디니스타 청년 조직과 예수회 신도, 수도 마나과의 중앙아메리카대학(UCA) 학생 등 약 9만여 명의 자원봉사자를 농촌과 도시 변두리로 파견, 5개월씩 현지 주민들과 함께 지내며 그들을 교육하도록 했다. 60~70년대 중국 문화대혁명기 하방(下方)운동의 산디니스타 버전이었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전자가 폭력적ㆍ권위적이었다면 후자는 상대적으로 자율적ㆍ자발적이었다는 점이다. 훗날 두고두고 발목이 잡혔지만, 산디니스타는 여느 혁명 정부와 달리 성공 후에도 독재정권의 고문 범죄자들까지 사면하며 관용과 화합을 중시했고, 콘트라 반군에 동조하던 우익 신문들에게도 보도 자유를 허용했다. 페르난도는 “우리의 문맹퇴치 캠페인은 파울로 프레이리의 ‘페다고지’ 정신에 입각한 상향식ㆍ민주주의적 교육 캠페인이었다. (…) 실제로 프레이리가 우리 프로그램을 돕기도 했다”고 말했다.(truth-out.org, 2010.10.30)

교육부장관 시절의 페르난도 카르데날(앞줄 왼쪽 두 번째). 다니엘 오르테가(세 번째, 군복 차림 안경 쓴 이)를 수행해서 1984년 한 도시(Condega)에 도착한 참이라고 한다.
교육부장관 시절의 페르난도 카르데날(앞줄 왼쪽 두 번째). 다니엘 오르테가(세 번째, 군복 차림 안경 쓴 이)를 수행해서 1984년 한 도시(Condega)에 도착한 참이라고 한다.

좌파 정권에 위기감을 느낀 미국은 콘트라 반군을 앞세워 산디니스타 정권을 초기부터 흔들어댔다. 그의 문맹퇴치 캠페인은 그 혼란 속에 달랑 석 달 만에 기획된 거였다. 잡음이 많았고, 프레이리 원칙의 희화화 버전(travesty of Freirean principles)이라는 조롱을 받기도 했다. 활동가 대다수가 경험 없는 이들이었고, 갓 고교를 졸업한 학생도 있었다. 그래도 어쨌건, 87년 그가 장관직을 떠날 무렵 니카라과의 문맹률은 유네스코 공식 통계로 12.96%로 줄어 있었다. 그의 캠페인은 이후 라틴아메리카의 공교육 모델로 확산됐다.(BBC, 2016.2.21)

요한 바오로 2세는 여러모로 인기 있는 교황이었다. 2000년 대희년을 맞아 기독교가 2000년 동안 조장ㆍ방조해 온 온갖 범죄를 시인하고 공개적으로 반성한 게 그였다. 물론 그는 콘돔조차 반대하던 엄격한 보수주의자였고, 폴란드 출신답게 가차없는 반공주의자였다. 중남미 해방신학을 ‘종교의 정치참여’라며 못마땅해 했지만, 더 엄밀히 말하면 그것이 좌파적이어서 경계했다. 바오로 2세는 산디니스타 정권의 사제 각료들(카르데날 형제 외에 둘이 더 있었다)에게 여러 차례 직ㆍ간접적으로 경고했다. 83년 중남미를 순방하며 니카라과에 들른 요한 바오로 2세는 공항에 마중 나온 에르네스토가 무릎 꿇고 반지에 입을 맞추려 하자 축복은커녕 손가락질까지 하며 대놓고 질타했다. 신의 종복과 정치의 종복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거였다. 니카라과 시민들과 전세계가 그 광경을 지켜봤다.

이듬해 교황청이 그들 니카라과의 혁명 사제들에게 성무 집행 정지 처분을 내리자, 중남미의 여러 해방신학 사제들이 그들을 응원하며 격려했다. 페르난도는 ‘내 친구들에게 드리는 글(Letter to My Friends)’이라는 공개 서한에서 자신의 선택이 왜 신앙과 위배되지 않는지 설명하며 “이번 조치는 가슴 아프지만, 크리스천의 입을 닫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썼다. 교황에 대한 공개적 비판 직후 그는 예수회 교단으로부터도 추방 당했다. 니카라과 예수회가 페르난도를 다시 받아들인 건 그가 오르테가 정부와 대립하던 1997년. 예수회가 추방한 사제를 다시 포용한 것도 500년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그는 ‘Faith and Joy’의 총괄 책임자로 복귀, 숨질 때까지 빈민 교육사업에 헌신했다.

2005년 12월 영국 우스터대학 매튜 크레인(Mathew Krainㆍ정치외교) 교수와의 인터뷰에서 페르난도는 “산디니스타 교육 이념은 인간을 ‘소비자’가 아닌 삶과 이웃을 사랑하는 존재로 교화하는 거였다. 그것은 로욜라 예수회 창시자 성 이그나티우스(Saint Ignatius)의 가르침, 즉 타인을 섬기고 사랑하라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물론 우리 커리큘럼에는 수학도 물리학도 화학도 있었지만, 그 모든 교육의 뿌리는 스스로와 가족ㆍ이웃의 가치에 대한 존중이었다”고, “유엔 인권헌장도 기독교적 가치의 종합 아닌가. 장관으로서 내가 기독교의 교리를 말하지는 않았지만, 인권을 말하고 인권을 보호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길이다”라고 말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대희년 참회’의 바탕에는 1960년대 2차 바티칸공의회가 있다. 당시 공의회는 교회의 품을 타종교로, 세계로, 모더니티로 개방했다. 페르난도는 “바티칸공의회의 그 선택이 쿠바 혁명과 니카라과 혁명의 차이를 낳았다”고, “쿠바의 사제들과 달리 니카라과의 사제들은 그 선택 덕에 혁명의 주체로 가담할 수 있었다”고도 말했다. 1968년 제2차공의회의 결정을 라틴 아메리카 사제들에게 공유시킨 회합이 열린 곳은, 페르난도의 각성이 시작된 그곳 콜롬비아 메데인이었다. 2015년 한 방송 인터뷰에서 그는 “내게 가난한 이들을 위한 혁명에 헌신하라고 요구한 것은 다름아닌 예수라고 믿어왔다. (…) 내 신앙과 공산사회주의자로서의 분별에 근거해 단언컨대, 내겐 교황의 목소리보다 예수의 목소리가 더 강했다”고 말했다.(NYT, 위 기사)

오르테가 정권은 고전했다. 내전으로 혼란은 지속됐고, 경제는 엉망이었다. 90년 다당제 선거에 패해 보수 연합 정권에 권력을 이양하기 전에도, 2007년 집권 여당과 야합해 재집권에 성공하고 헌법까지 고쳐 3선 대통령이 된 뒤에도, 그의 권력은 혁명 원칙의 폐기와 보수화로 치달았다.

페르난도의 형 에르네스토 카르데날(1925~)
페르난도의 형 에르네스토 카르데날(1925~)

형제는 오르테가 정권의 맹렬한 비판자였다. 미국 시단에서 시인으로 명성을 얻은 에르네스토는 2011년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서 “오르테가 정권은 좌파도 아니고 혁명적이지도 않다. 단지 가족 독재정권일 뿐이다”라고 말했다.(WP, 2011. 5.30) 직전 그는 ‘종의 기원(The Origin of Species)’이란 제목의 시집을 냈다. 과학적 사유에 기초한 생명 본질의 사유와 문명ㆍ소비 문화의 반인간적 행태를 고발하는 시편들을 모은 거였다고 한다. 예컨대 지난 주‘가만한 당신-마시카 카추바’편에서 다룬 휴대폰과 콩고 전쟁의 폐해를 소재로 한 시도 거기 있었다. 그는 “사이언스 픽션(SF)이 있듯이 과학적 시(science poetry)도 있다”며 자신의 최근 시들이 이를 테면 ‘SP’라고 말했다. ‘화이트 홀(White Holes)’이라는 시에서 그는 생명에서 생명으로 이어지는 삶과 죽음의 성스러운 순환(Sacred recycling)을 이야기한 뒤 “It’s entering into new combinations… In the final Revolution the dead/ will all be resurrected”라고 노래했다. 우주의 생명질서와 혁명적 낙관 위에서 그는 조국 니카라과의 오늘을 비판했다.

동생 페르난도는 2014년 조지타운대 인터뷰에서 “(5,6년 전 스페인에서) 정치적 환멸을 어떻게 견디냐는 질문에 ‘청년들이 희망’이라고, ‘그들이 거리로 돌아가 새로운 역사를 만들리라 희망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 직후 마나과의 시위 현장에서 자신이 했던 저 말이 적힌 피켓을 보았다고 덧붙였다.

BBC는 페르난도가 ‘Faith and Joy’ 홈페이지에 “내가 이 생을 떠나야 할 때(…) 커다란 슬픔을 안고 가게 될까 두렵다. 니카라과는 여전히 라틴아메리카의 가장 가난한 나라이고, 시민 절반이 여전히 가난 속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을, 우리의 시민들을 속이지 말자”고 썼다고 전했다. 그는 교육 투자조차 외면하는 오르테가 정부의 ‘배신’을 성토했다.

2014년 복권 이후 페르난도는 성직자로서, 교계의 논쟁적 이슈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발언했다. 에스타 노체(Esta Noche) TV 인터뷰에서 그는 대학 시절 한 동성애자를 폭행한 사실이 있다고 고백하며 “당시의 나는 짐승이었다”고 참회했다.(Havana Times, 2016.2.22) 그는 가톨릭이 동성애 편견을 극복하고 그들을 포용해야 한다고, 여성 사제 서임과 성직자 독신주의(celibacy) 등에 대해서도 전향적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6년 오르테가 정부가 가톨릭 보수교단의 지지를 얻기 위해 낙태를 전면 불법화한 것도 비난하며 ‘치료적 낙태(therapeutic abortion)’는 마땅히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internacional.elpais.com, 2016.2.20) 그는 “통제(rules)보다는 자비(mercy)를 더 중시하자”고 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로써 교황의 등을 떠밀었다.

마나과 중앙아메리카대학(UCA) 강당에서 열린 그의 장례미사에는 등 돌리고 지낸 수많은 동지와 옛 동지들이 모였다. 정부 대표로 참석한 전 교육부장관 미겔 데 카스티야(Miguel de Castilla)는 추도사에서 “페르난도의 교육 업적은 니카라과뿐 아니라 전 라틴아메리카의 유산으로 남을 것이다. (…) 그는 카를로스 폰세카(Carlos Fonseca)처럼, 체 게바라처럼, 한결같이 우리의 말과 행동 속에 살아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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