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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과 교수

등록 : 2015.12.10 14:33
수정 : 2015.12.10 16:54

[김월회 칼럼] 정직하게 되갚아주어라!

등록 : 2015.12.10 14:33
수정 : 2015.12.10 16:54

당신이 엄청나게 당했다. 그럴 만한 어떠한 이유도 없었다. 그냥 한 고을에서 같이 살았다는 게 죄라면 죄, 생각할수록 너무 억울할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당신보다 더 큰 힘을 지니고 있다. 되갚고자 해도 현실적으로 방도가 없었다.

분노는 삶을 통짜로 망가뜨리기 마련, 몸도 마음도 생활도 어그러졌다. 문득 현자를 찾으면 해법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마침 당신 고을엔 온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두 명의 현자가 살고 있었다. 짬을 내어 그들을 찾았다. 기대대로 그들은 답을 주었다. 그런데 그 답이 정반대였다. 하나는 원한을 은덕으로 되갚으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받은 만큼 정직하게 되돌려주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문제 하나. 앞서 말한 현자는 공자와 노자였다. 자, 그렇다면 위의 답변 가운데 어느 것이 공자의 말이고 또 어느 것이 노자의 말일까? 공자는 주지하는 바대로 ‘어짊(仁)’의 대명사이고, 노자는 부드러움의 참된 힘을 역설하던 물을 닮은 현자였다. 왠지 두 사람의 입에서 받은 만큼 고스란히 되돌려주라는 말은 안 나올 성싶다. 그러나 당신이 받은 답변은 분명 두 사람에게서 각각 받은 권고였다. 그렇다면 공자는 어떤 권고를 했을까?

언뜻 은덕으로 되갚으라, 다시 말해 용서해주라는 권고가 공자가 한 말일 듯싶다. 스승의 도를 개괄하자면 결국 ‘용서함’뿐이라는 증자의 증언이 말해주듯이, 용서는 공자가 말한 어짊의 요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답은 “원한은 받은 만큼 그대로 되갚아주어라(以直報怨)”이다. 한마디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되갚으라고 한 셈이니, 용서를 강조하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믿기엔 자못 석연치 않다. 게다가 한 입으로 두 말 하는 이가 성인의 반열에 오를 수는 없었을 터, 뭔가 그렇게 말한 까닭이 틀림없이 있었을 것이다.

공자의 시대에 복수는 지식인이라면 반드시 곱씹어야 할 문명의 화두였다. 지식인이라면 반드시 복수에 대한 자기 관점이 서있어야 했다는 뜻이다. 공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마침 어떤 이가 은덕으로 원한을 갚는 것(以德報怨)은 어떠하냐며 물어왔다. 그러자 공자는 그럼 은덕을 입으면 무엇으로 되갚아야 하냐고 되물었다. 그러고는 “원한은 받은 만큼 그대로 되갚아야 하고, 은덕에는 은덕으로 되갚아야 한다”(‘논어’)고 단언했다.

다소 낯설 수도 있다. 은혜도 복수처럼 되갚아야 하는 것이라는 공자의 관점이. 그런데 공자만 복수와 보답을 연동시켜 사유한 것은 아니었다. 중국에선 먼 옛날부터 줄곧 원한과 은덕은 둘 다 되갚아야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누가 피해를 입힐 때만 되갚은 게 아니라, 은혜를 베풀어도 꼭 되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여 은혜를 입었음에도 보답하지 않으면 십중팔구 뒤탈이 난다고 믿었다. 이는 황제조차 예외가 아니어서 “은혜를 갚지 않으면 위험에 빠지게 된다”(‘회남자’)고 경고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은혜를 베푼 이에게도 덕으로 갚고, 원한을 맺게 한 이에게도 덕으로 갚는다면 과연 누가 은혜를 베풀겠는가? 내가 누군가에게 해를 끼쳤음에도 보복받기는커녕 오히려 그가 내게 덕을 베푼다면 그를 또다시 괴롭히지 않을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는가? 공자가 피해를 입은 만큼 되돌려주라고 권고한 까닭이 이해되는 대목이다. 안 그러면 피해를 더 입게 되고 결국 파멸, 그러니까 더 이상 손해 볼 게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다.

논자들이 개인이든 사회이든 간에 복수가 진보의 동력이었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바로 이것이었다. 더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보복을 해야 했고 그러려면 힘을 키워야 했다. 복수가 ‘너 죽고 나 죽자’ 식의 자포자기일 수도 있지만, 추가적 피해를 보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강화하는 과정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은덕으로 원한을 갚으라”는 노자의 권고는 머리론 이해돼도 현실적으론 무기력한 이상이라 비판받기도 했다.

신기한 일은 21세기 첨단 디지털 문명을 구가하는 한국엔 노자의 권고를 따르는 이들이 참으로 많다는 점이다. 부자를 만들어주겠다는 감언이설에 열광했던 전력으로 보건대, 그들이 세속의 가치를 부정하며 자연을 닮고자 하지는 않은 듯하다. 그럼에도 그들은 노자의 권고를 우직하게 실천하고 있다. 헌법을 유린하고 양식을 조롱하는 이들이 자신의 정당한 권리와 이익을 침탈하고 또 해도 그들은 은덕을 베풀고 또 베푼다. 이치대로라면 응당 고양이였어야 할 이들이 기꺼이 쥐가 되더니, 그것으로도 모자라 고양이에게 동정을 베푸는 격이다.

본래 동정은, 관용이 그러하듯이 강자가 약자에 대해 품는 연민이다. 고양이이기에 쥐를 동정하고 용서할 수 있는 것이지, 쥐가 된 처지에서 고양이를 동정하고 용서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노자의 말은 그래서 사회적 강자에 대한 권고일 때 유의미하다. 그렇다면 공자의 권고는 누구에게 유효할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고금의 역사가 밝히 말해주듯, 가만히 있으면 결국 잡아 먹히고 말 따름이라는 점이다.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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