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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흥수 기자

등록 : 2018.06.05 18:00
수정 : 2018.06.06 23:41

빛 바랜 골목…시간을 거슬러 중세 유럽을 걷다

피렌체에 맞선 토스카나의 중세 도시...유네스코 세계유산 시에나

등록 : 2018.06.05 18:00
수정 : 2018.06.06 23:41

피렌체와 피사는 들어봤는데 시에나는 익숙하지 않다. 시에나(Siena)는 이탈리아 토스카나주(州) 10개 지역 중 시에나 프로빈차의 중심 도시다.프로빈차(Provincia)는 여러 개의 기초자치단체를 거느린, 우리말로 옮기면 현(縣) 정도의 행정 단위다. 한국에는 아직 낯설지만 시에나 도심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돼 있다. 이웃 피렌체와의 경쟁에서 밀리긴 했지만, 15세기까지 상업과 교통의 중심지로 번성한 덕에 르네상스 이전 중세 도시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다. 시청이 있는 '캄포광장’을 중심으로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관광 명소이기도 하다.

토스카나주 시에나 역사지구 모습. 빛 바랜 중세의 건물들이 대성당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골목을 형성하고 있다. 만자탑(Torre del Mangia)에서 휴대폰 카메라 파노라마 기능을 이용해 찍었다. 시에나=최흥수기자

지역의 중심이라고 하지만 시에나는 인구 5만명(2014년 기준 약 5만3,900명)이 조금 넘는 작은 도시다. 유럽의 오래된 도시처럼 차량의 방해를 받지 않고 걸어서 둘러볼 수 있는 수준이다. 살림베니 궁전에서 시에나 대성당까지 이어지는 약 600m의 주 도로와 이곳에서 가지를 뻗은 작은 골목들이 미로처럼 이어진다.

피렌체의 위세에 밀렸다는 열등감을 시에나는 로마에서 찾는 듯하다. 조금만 눈여겨보면 시내 여러 곳에서 ‘카피톨리나 늑대상’을 발견할 수 있다. 로마를 건국한 전설 속의 인물 로물루스와 레무스 쌍둥이 형제가 늑대 젓을 먹고 있는 모습의 석상이다. 시에나는 레무스의 두 아들이 세웠다고 전해진다. 그들의 아버지가 로물루스에게 살해당하고 로마에서 도망쳐 나올 때 가져 온 이 석상은 시에나의 상징물이 되었다. 검은색과 흰색으로 구성된 시에나의 문장(紋章)도 두 형제가 타고 온 흰 말과 검은 말을 상징한다.

시에나 도심 곳곳에서 ‘카피톨리나 늑대상’을 볼 수 있다.

시에나의 건물마다 17개 구역(Contrade)을 상징하는 깃발이 내걸려 있다.

관광객과 주민들이 시에나의 고풍스런 거리에 섞여 있다.

시에나의 골목에는 건물마다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깃발들이 촘촘하게 내걸려 있다. 오리와 용 등 다양한 동물과 마스코트가 그려진 깃발은 중세부터 유지해 온 시에나의 17개 구역(Contrade)을 상징한다. 외지인은 구분할 수 없지만 각 구역마다 경계를 뚜렷하게 한 모습이 흥미롭다. 구역 간의 경쟁은 캄포광장에서 열리는 경마 경주인 ‘팔리오(Palio)’에서 두드러진다. 팔리오는 경마, 활쏘기, 마장마술 등 중세 스포츠를 펼치는 축제로 이탈리아 여러 지역에서 열리지만, 시에나의 경마 경주가 가장 규모가 크고 유명하다. 매년 7월 2일과 8월 16일 두 차례 캄포광장에서 열리는 팔리오는 전국적으로 TV 생중계를 할 정도로 인기를 누리는 시에나의 자부심이기도 하다. 골목을 걷다 보면 팔리오 경기 사진을 외벽에 걸어 놓은 건물도 자주 보인다.

팔리오 경기가 열리는 캄포광장은 평시에는 관광객 차지다. 조개껍데기 모양으로 넓은 광장에는 일광욕을 즐기는 시민들을 비롯해 깃발을 든 단체 관광객과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이 뒤섞여 늘 붐빈다.

광장 동남쪽 만자탑(Torre del Mangia)은 시에나의 또 다른 상징이다. 1층은 시청, 2~3층은 시립미술관으로 이용하는 푸블리코 궁전 한쪽 귀퉁이에 사각 기둥처럼 102m 높이로 우뚝 솟아 있다. 꼭대기에 오르면 시에나의 고풍스러운 지붕과 골목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분명 익숙하지 않은 풍경인데도 낯설거나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래됐다는 건, 손때를 묻은 듯 정감이 더해지고 거기서 오는 평온함과 일맥상통한다. 적색에서 주황으로 빛 바랜 지붕과 벽돌 사이로 길게 이어지는 골목 끝은 토스카나의 목가적 풍경과 연결된다. 수평선 언저리에 뭉실뭉실 피어 오르는 구름도 평화롭다. 입장료 10유로에 505계단을 올라야 하는 비용과 수고가 아깝지 않다. 계단이 좁아 오르내리는 사람과 교차할 때는 모서리에 붙어서야 할 정도지만, 그때마다 작은 창으로 액자처럼 보이는 시에나의 풍경이 지친 숨소리를 감탄사로 바꿔 놓는다.

관광객으로 붐비는 캄포광장과 만자탑.

만자탑에서 내려다 본 풍경. 미완으로 남은 시에나 대성당 출입문 꼭대기에도 관광객이 올라가 있다.

캄포광장을 중심으로 고색창연한 중세 건물들이 밀집해 있다.

시에나 대성당 외관은 현대적 감각에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화려하고 세련되다.

시청과 시립박물관이 입주해 있는 푸불리코 궁전 입구.

오래된 귀족들의 저택 안뜰은 레스토랑으로 이용된다.

만자탑 서쪽 편의 건물 꼭대기에도 시내를 조망하는 관광객으로 북적거린다. 미완으로 남은 시에나 대성당의 동쪽 출입구 성벽이다. 14세기 중반까지 100년이 넘는 기간에 걸쳐 완공한 시에나 대성당은 이탈리아 로마네스크ㆍ고딕 건축의 완전체로 평가된다. 본래 계획은 본당과 이 출입구를 연결해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바실리카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재정 결핍과 전쟁, 역병 등으로 계획이 틀어지게 되었고, 동쪽 벽만 덩그러니 분리돼 전망대로 이용되고 있다. 애초 계획대로 완성하지 못했음에도 시에나 대성당은 당대 최고 건축물로 평가받는다. 토스카나 지역의 천연 대리석을 색깔 그대로 짜맞춰 장식한 외벽은 그 당시의 첨단 유행과 화려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시에나를 상징하는 흰색과 검은색 대리석으로 모양을 낸 종탑은 현대적 감각에도 뒤지지 않는다. 대리석 상감으로 새긴 내부 모자이크와 프레스코 장식도 이탈리아에서 가장 정교한 예술품으로 꼽힌다.

기념비적인 건축물이 아니어도 시에나의 골목 어디나 중세의 향기가 물씬 풍긴다. 1472년부터 은행 영업을 시작했다는 건물이 있는가 하면, 르네상스 양식의 상인조합, 중세 시대 귀족 가문의 안뜰을 볼 수 있는 궁전 등 도시 전체가 건축과 역사박물관이다.

시에나(이탈리아)=최흥수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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