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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끝뉴스] 국책기관 센터장 '천황폐하 만세' 사건의 전말

입력
2016.08.31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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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호 전 KEI 국가기후변화적응센터장은 올해 1월, 5월 개최된 직원 워크샵에서 건배사로 “천황폐하 만세”를 외친 의혹을 받으며 사회적 파장을 야기했다. 게티이미지 뱅크
이정호 전 KEI 국가기후변화적응센터장은 올해 1월, 5월 개최된 직원 워크샵에서 건배사로 “천황폐하 만세”를 외친 의혹을 받으며 사회적 파장을 야기했다. 게티이미지 뱅크

광복 71주년을 맞은 2016년 대한민국에서 “천황(일왕)폐하 만세”를 외친 공직자가 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이런 의혹이 지난 6월 한 언론사 보도를 통해 제기됐습니다. 주인공은 한국환경정책ㆍ평가연구원(KEI) 소속 이정호 전 국가기후변화적응센터장입니다.

1992년 설립된 KEI는 국무총리실 산하 정부출연 연구기관으로, 환경 분야의 정책과 기술을 연구ㆍ개발하는 곳입니다. 이 전 센터장이 몸 담은 국가기후변화적응센터는 온실가스 감축정책 등을 연구하며 정부 기후변화협상을 지원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전 센터장의 친일 논란이 기사로 나간 6월 23일 KEI 측은 즉각 해명자료를 내고 “본 보도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반박했습니다. 해당 언론사에 법적 대응을 하겠다는 경고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난달 29일 국무조정실 감사결과는 ‘친일 발언의 개연성이 매우 높다’며 중징계를 요구했습니다. 이에 따라 이달 24일 열린 징계위원회는 이 전 센터장에 정직 2개월 처분을 내렸습니다. 이것만 보면 “사실과 다르다”고 펄쩍 뛰었던 KEI가 거짓말을 한 것처럼 비쳐진 셈입니다.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사건은 KEI가 올해 1월과 5월 경기 안산시 대부도 등에서 개최한 내부 워크샵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올해 1월 센터장에 취임한 이 전 센터장은 워크샵에서 “할아버지가 일제시대에 동양척식주식회사의 고위 임원이었다” “나는 친일파다” “일본은 어머니의 나라다” 등 발언을 하고, 건배 제의 때 “천황폐하 만세”를 세 차례 외친 의혹을 받고 있습니다. 사실이라면 그 자리에 있었던 다른 직원들에게 전해졌을 충격은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KEI 측은 처음에 “이 전 센터장이 참석했다는 워크샵 자체가 없다”고 했다가 이내 “내부 직원들 단합대회 성격의 워크샵이 있긴 했지만 확인 결과 해당 발언은 없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최초 보도 당일 박광국 KEI 원장을 단장으로 하고 감사실장 및 주요 본부장으로 구성된 진상조사단도 꾸려져 사실관계 파악에 나섰습니다. 조사단은 다음날까지 해당 워크샵에 참석한 직원 31명을 상대로 대면 조사를 실시했고, 누구도 그런 발언을 들은 사실이 없다는 진술을 확보했습니다.

그런데 사안이 사안인 만큼 보도 다음날인 24일 국무조정실도 별도 감사에 착수하게 됩니다. 국조실이 한 달여 동안 워크샵 참석자를 포함해 환경 관련 외부기관 직원 등 7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감사결과는 KEI 측의 자체 진상조사 결과와 달랐습니다. 7월 29일 공개된 국조실 문책요구서는 이 전 센터장이 “일본은 어머니의 나라다”라는 발언을 한 것을 한 직원이 들었다고 했으며, 천황폐하 만세 삼창에 대해서는 ‘일대일 면접조사에서는 모든 직원이 부인했으나 무기명 설문 조사에서는 직원 2명이 해당 발언을 들은 것으로 응답했다’고 밝혔습니다. 워크샵 당일 이 전 센터장이 주량 이상의 술을 마셨던 상황 등을 종합하면 해당 발언을 외쳤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고 봤습니다.

국책연구기관 부서장으로서 품위 있는 언행을 하지 못한 점을 두고 국조실은 KEI 측에 중징계를 요구했습니다. 징계위원회가 결국 이 전 센터장에게 정직 2개월 처분을 내리면서 사건은 일단락 됐습니다. KEI 관계자는 “자체 진상조사 결과 모든 직원이 친일 발언을 듣지 못했다고 확인한 것은 변함 없는 사실이지만, 어쨌건 이 전 센터장이 술을 마시고 가벼운 언행으로 물의를 일으켰기 때문에 품위유지 의무 위반 측면에서 징계를 내리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징계에 앞서 6월 26일부로 직무가 정지된 이 전 센터장은 현재 최초 보도한 언론사를 상대로 민ㆍ형사상 소송을 진행 중인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기자는 이 전 센터장과 수 차례 연락을 시도했지만 “소송 중이라 외부 연락이 어렵다”는 거부 의사가 간접적으로 전달됐습니다. KEI 측은 이 전 센터장의 소송 결과에 따라 추가 대응을 정하겠다는 방침입니다.

이 전 센터장의 친일 논란은 법정에서 다시 한 번 사실 여부가 가려지겠지만, 국조실 감사 결과로 인해 KEI의 초기 대응이 문제가 있었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게 됐습니다. 진상조사가 마무리 되기도 전에 “보도 내용이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성급히 결론을 내린 것이 대표적입니다. 한 달에 걸친 국조실 감사에 비해 KEI 자체 진상조사는 기간이 이틀에 불과했습니다. 조사 때 참석자들을 상대로 녹음을 실시한 대면 조사가 이뤄진 탓에 솔직한 진술이 나오기 어려웠다는 점도 한계로 지목됩니다. 만약 국조실 감사가 없었다면 사건은 사실 무근으로 남았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최근 교육부 고위 관료가 술자리에서 “민중은 개돼지”라는 발언을 하는 등 공직자의 언행이 연이어 사회적 파문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일련의 사건들이 공직사회의 도덕성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장재진 기자 blan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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