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무슨 일이 역대 최악의 엘니뇨 덮쳐 대형 가뭄·폭염·홍수로 몸살 전 세계 2만3천명 사망 한국도 지리산서 기록적 폭우 피서객 등 91명 사망·실종
올 여름~내년 여름 위험 5월 남미 지역 해수면 온도 상승 엘니뇨 판단 기준 0.5도의 10배 바닷물 뒤섞어 주는 무역풍도 역풍에 밀려 제 힘 발휘 못 해 엘니뇨 발생 확률 70~80%
긴장하는 지구촌 아라비카 원두 가격 이미 2배↑식량가격도 15%급등 경고 돌발적 기상 이변도 잦아 세월호 참사 같은 대형 재난 1년 안에 재발 가능성 높아져
1998년 7월 31일 밤 지리산 남쪽 계곡에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다음날 오전까지 8시간 동안 강수량 250㎜. 경남 산청 일부 지역은 1시간 동안 83.5㎜ 강수량을 기록한 곳도 있었다. 게릴라 호우였다. 계곡에서 불어난 물은 삽시간에 피서객을 덮쳤다. 이 사고로 52명이 숨지고 39명이 실종되는 참사가 빚어졌다.
기상이변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이 집중호우는 그 해 동태평양 지역에서 발생한 엘니뇨의 영향으로 발생했다. 엘니뇨는 1950년부터 지금까지 총 13차례 나타났는데, 1998년 엘니뇨는 그 중 최악으로 꼽혔다. 당시 인도에서는 섭씨 40도를 넘는 폭염으로 2,500명이 숨졌고, 중국에서는 양쯔강이 범람해 1,5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미국 뉴사우스대학 연구에 따르면 이 해 발생한 엘니뇨의 영향으로 전 세계에서 약 2만3,000명이 사망했다. 재산 피해액은 350억 달러(35조8,4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됐다. 기후전문가들이 1998년의 엘니뇨를 ‘몬스터 엘니뇨’라고 이유다.
그런데 올해 말 동태평양 지역의 수온이 심상치 않다. 전세계 기후전문가들이 1998년에 버금가는 엘니뇨가 발생할 것이라는 우려 섞인 전망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16년 만에 몬스터 엘니뇨가 돌아올 조짐을 보이는 것이다. 에릭 블레이크 미국 해양대기청(NOAA) 기후전문가는 미국 언론에 “엘니뇨의 발생 원인인 동태평양의 해수면 온도와 무역풍 등의 상황이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며 “1998년 엘니뇨 발생 직전과 소름 끼치게 닮았다”고 지적했다.
몬스터 엘니뇨 귀환 조짐
남미 페루와 칠레 해안의 해수면 온도가 이례적으로 상승하는 것을 일컫는 엘니뇨는 에스파냐어로 ‘어린 아이’(아기 예수)를 뜻한다. 엘니뇨가 여름부터 발달하기 시작해 크리스마스가 있는 12월 말에 최대 세력권을 형성하고 다음 해인 여름에 쇠퇴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동태평양 해수의 월평균 온도가 평년보다 0.5도 이상 높아진 상태를 6개월 이상 보이면 엘니뇨라고 한다.
올해 말 엘니뇨 발생은 기후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거의 기정사실이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미국 기후예측센터(CPC)는 “오는 12월 말에 태평양에서 엘니뇨가 발생할 확률은 80%에 달한다”고 밝혔다. 엘니뇨의 주요 영향권에 속하는 호주의 기상연구소(ABM)도 “4개월 안에 최소 70% 이상의 확률로 엘니뇨가 발생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엘니뇨란 태평양 상공에서 부는 무역풍이 약해질 때 일어난다. 북동풍인 무역풍은 태평양 바다를 순환시키는 원동력이다. 표층의 따뜻한 바닷물과 심해의 차가운 해수를 뒤바꿔 수온을 일정하게 유지한다. 그런데 미국 국립허리케인센터(NHC)의 에릭 블레이크는 “동태평양에 시간당 16㎞의 속도로 무역풍이 불고 있다”면서도 “그러나 서태평양 지역에서 그 3배에 달하는 시속 약 50㎞의 바람이 무역풍 반대 방향으로 불고 있다”고 우려했다. 무역풍이 역풍에 가려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무역풍이 약해지는 건 지구온난화 영향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과학계에서는 아직 그 이유를 명확히 밝히지 못하고 있다. 이밖에 서태평양의 따뜻한 해수가 동태평양으로 이동하는 현상인 ‘켈빈 웨이브’의 크기도 1998년 엘니뇨 때 수준에 거의 근접한 것으로 조사됐다.
중요한 것은 엘니뇨의 강도다. 해수면 온도가 평년보다 얼마나 치솟는가에 따라 유명무실한 엘니뇨가 될 수도, 아니면 세계에 가뭄과 홍수, 폭염 등 기상이변을 일으키는 몬스터 엘니뇨가 될 수도 있다. 기상청과 NOAA에 따르면 동태평양의 해저수온은 올해 5월 기준으로 평년보다 5~6도 정도 높았다. 이 같은 고(高)수온 지역의 면적은 미국을 덮을 정도이고, 두께로는 수심 100m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동태평양에 미국 크기 만한 보일러가 끓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몬스터 엘니뇨의 등장을 벌써 단정하는 건 시기상조라는 지적도 있다. 약한 엘니뇨에서 몬스터 엘니뇨로 변하려면 무역풍을 지금보다 훨씬 더 약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미국 민간 기상예보기관인 국제기상서비스(WSI)의 마이클 벤트리스는 “서태평양 지역에서 무역풍을 약화시키는 역풍이 지금보다 강해진다면 몬스터 엘니뇨가 발생할 결정적인 추진력을 얻게 된다”며 “아직 방아쇠는 당겨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게릴라성 호우 등 극단적인 기상변화
올해 말 몬스터 엘니뇨가 발생하더라도 한반도의 경우 해양과 대륙 사이에 있어 페루나 호주처럼 홍수, 가뭄 등과 같은 명확한 이상 기후에 직면할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가장 우려되는 것은 1998년 같은 돌발적인 기상 변화다. 기상청의 엘니뇨 자문위원인 국종성 포항공대 환경공학부 교수는 “엘니뇨는 우리나라의 기후변동성을 극단적으로 크게 할 것”이라면서 “폭우와 폭염 등 예측할 수 없는 돌발 기상현상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국 교수는 몬스터 엘니뇨가 발생할 경우 올해 여름부터 내년 여름까지는 매우 위험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엘니뇨의 영향으로 올 겨울 한반도는 상당히 따뜻할 것으로 전망된다. 동태평양의 수온 상승이 지구 온도를 전체적으로 상승시키기 때문이다. 겨울 강설량은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 보통 약한 엘니뇨는 폭설을 불러오고, 강한 엘니뇨는 반대로 강설량을 낮추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한반도의 경우 대륙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변수가 많다. 다만 가을은 강수량이 적어 맑고 청명한 날이 예년보다 많을 것이라는 데는 대부분이 동의한다.
전세계적으로는 엘니뇨가 발생하는 동태평양 주변 지역에 가장 큰 기상이변이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피해 지역은 동태평양을 어장으로 쓰고 있는 남미 국가들이다. 동태평양의 수온이 따뜻해지면 바다에서 상공을 향한 강한 상승기류가 만들어져 비구름을 몰고 오는 저기압이 만들어진다. 엘니뇨가 발생한 해에 남미국가인 페루와 에콰도르 등에서 홍수가 잦았던 이유다. 1998년 엘니뇨 때 페루에서는 홍수로 200명이 숨지고 35억 달러의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반대로 서태평양의 호주, 인도, 동남아시아 등은 가뭄과 대형 산불에 시달린다. 바다에서 하강기류가 발생해 강항 고기압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엘니뇨로 혜택을 보는 지역도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가 대표적이다. 이곳은 원래 강우량이 적어 매년 가뭄에 시달린다. 엘니뇨가 발생하면 동태평양의 수온이 데워져 막대한 양의 수증기가 상공으로 올라간다. 그 위에는 북반구를 휘도는 강한 바람 통로인 제트기류가 흐르고 있다. 제트기류에 실린 수증기는 캘리포니아를 지나며 많은 비를 뿌린다. 가뭄이 해갈되고 곡물 생산에도 큰 도움을 준다. 엘니뇨는 또 여름에 적도 부근에서 발생하는 태풍을 억제하기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라비카 원두 가격 두 배로 올라
몬스터 엘니뇨 발생에 가장 민감한 곳은 원자재와 곡물 시장이다. 엘니뇨는 홍수와 가뭄 등 기상이변을 몰고 오는 만큼 원자재와 작물 생산량에 악영향을 미치고 결국 가격 상승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인도네시아는 세계 최대의 니켈 생산국이다. 그런데 인도네시아의 광업 장비는 수력발전 에너지에 대부분 의존하고 있다. 엘니뇨로 인도네시아의 강수량이 감소하면 니켈 생산도 차질을 빚게 된다. 또한 고급 아라비카 커피 원두를 생산하는 브라질은 7, 8월에 폭우가 내릴 경우 작물 수확에 피해를 본다. 올해 아라비카 가격은 공급 부족 우려로 이미 두 배 이상 오른 상태다. 세계은행 수석 경제학자인 존 베프스는 “엘니뇨가 발생하고 3개월 정도면 세계 식량가격은 15%까지 급등할 것”이라며 “엘니뇨로 기상이변이 심해지면 최악의 상황이 닥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곡류 수입의존도가 높은 북아프리카와 중동 같은 지역은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우려되는 건 인명피해가 뒤따르는 자연재해다. 몬스터 엘니뇨가 올해 말 발생하면 돌발적인 기상 악재로 전세계적으로 수만 명의 사상자가 나올 수 있다. 세월호 참사 급의 대형재난이 앞으로 1년 안에 또다시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양기근 원광대 소방행정학과 교수는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정부의 재난관리시스템에 대한 획기적 전환이 있어야 한다”면서 “서둘러 대비하지 못하면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때 또 한번의 비극적 참사로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김현우기자 777hyunwoo@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