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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경험론의 문제점, 러셀의 역설

입력
2016.12.25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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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경험에 근거해서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하는 것이야말로 이성을 가진 인간에게 기대되는 행동양식이다. 하지만 이러한 경험적 예측에는 어떤 문제가 있을까.

존은 시장에서 칠면조 한 마리를 사 왔다. 칠면조는 두려웠다. 이 인간이 나를 어떻게 하지는 않을까. 아침 9시가 되자 존은 종을 쳤다. 칠면조가 돌아보니 존이 웃으며 손짓한다. ‘뭐지, 나를 유인해서 잡아먹으려는 건가.’

존은 먹이가 가득 담긴 바구니를 칠면조에게 보여준다. 칠면조는 조심스레 존에게 다가간다. 그리고는 최대한 경계하며 먹이를 먹는다. 존은 흐뭇하게 쳐다보았다.

다음날 아침 9시 존은 다시 종을 쳤다. 칠면조는 어제보다 용기를 가지고 살금살금 존에게 다가갔다. 여전히 존은 환하게 웃으며 먹이 바구니를 내놓았다.

1주일, 한 달, 두 달, 여섯 달.

존의 행동은 변함이 없었다.

매일 아침 9시만 되면 종을 쳤고, 칠면조는 아무런 의심 없이 달려가서 편안하게 먹이를 먹었다.

1년째 되는 날 아침, 칠면조는 존의 종소리를 듣고 여느 날과 같이 기쁜 마음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왠지 느낌이 이상했다. 앗, 바구니에는 먹이가 없다. 순간 뒤에서 ‘슛’하는 소리가 들렸다. 존이 큰 칼로 칠면조의 목을 내리치는 소리였다. 다음날 칠면조는 존 가족의 추수감사절 파티 상에 메인 메뉴로 올라갔다.

위 사례는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의 ‘철학의 문제들ㆍThe problems of philosophy’에 나오는 ‘닭의 예화’를 칠면조로 약간 비틀어 본 것이다. 러셀은 ‘경험론’이 얼마나 어리석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가를 그 특유의 위트로 위와 같이 풀어냈다.

칠면조는 하루하루 축적되는 경험 속에서 ‘존은 아침 9시에 먹이를 준다’는 것을 하나의 법칙처럼 믿었고 그 법칙에 따라 행동했다. 하지만 칠면조에게 닥친 결과는 끔찍했다. 하지만 사실 존은 시장에서 칠면조를 사 올 때부터 1년 동안 열심히 키운 다음 추수감사절 파티에 써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것이 존의 계획이요 디자인이었다. 칠면조는 자신이 경험하는 범위 내에서 상황을 파악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오류를 범했던 것이다.

경험을 통해서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서는 ‘경험 그 자체’보다 ‘경험의 질’이 더 중요하다. 경험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존이 매일 먹이를 준다는 사실’ 그 자체에 머물 것이 아니라 ‘왜 먹이를 주는지’ 파악해보아야 한다. 나아가 이웃에 있는 다른 동물들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과거에 나 말고 다른 칠면조가 없었는지, 그리고 그 칠면조는 어떻게 되었는지.

칠면조가 그런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었다면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 그에 대해 대비를 할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매일 규칙적으로 주어지는 먹이는 충분히 안락하고 달콤했기에 굳이 다른 생각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과거의 경험은 그냥 참고에 그칠 뿐이다. 과거의 경험을 절대적인 것으로 믿고 그에 따라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존에게 생명을 맡긴 칠면조만큼이나 어리석고 위험하다.

그렇다면 과연 칠면조에게는 단 한 번이라도 미래 위험에 대한 신호가 없었을까. 아니면 그런 신호가 있었는데도 칠면조는 현실에 안주했던 것일까.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 토대(직장이든, 제휴관계든).

어제까지 굳건했다고 해서 과연 내일, 모레도 굳건하다 할 수 있을까. 위험의 시그널이 감지되고 있는데, 오늘의 실적에 취해서 그 시그널을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과거의 경험이 한순간에 휴짓조각이 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과거는 참고에 그칠 뿐 절대적인 교훈이나 법칙이 될 수 없다.

우리가 항상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조우성 변호사ㆍ기업분쟁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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