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주먹코 형님은 누구죠?”
경북 경주 천마총 주위를 어슬렁거리다 황남빵을 하나 사 먹고 울산 방향으로 10여 ㎞ 국도를 달리다 만난 신라 38대 원성왕릉(785-798). 그곳을 지키는 무인상은 주먹코에다 돌깡패였다.
키 257㎝, 가로 세로가 별 차이 없는 사각형 얼굴에 곱슬머리, 깊숙이 터잡은 눈, 주먹만한 코, 누구를 한 대 쥐어박으려는 듯 앙다문 입술, 덥수룩한 수염, 울퉁불퉁한 팔뚝 근육이 영락없는 조직의 돌격대장이었다. 마주보고 서 있는 한 쌍의 무인상은 다른 인물이 틀림없었지만 첫인상은 오십보 백보였다.
왕의 시신을 연못 수면 위에 널빤지로 걸어 장례했다는 속설에 따라 일명 괘릉으로 불리는 원성왕릉 주위로 12지신상 조각과 돌사자, 문인석, 무인석 등이 무슨 열병하듯 서 있었다. 봉분에서는 가장 멀리 떨어져있고, 담장도 없는 입구에서는 가장 가까운 자리에 서 있는 양반이 바로 그 유명한 ‘괘릉 무인상’이었다.
이 무인상은 전형적인 서역인, 그러니까 페르시아나 소그드 사람으로 추정되고 있다. 페르시아는 이란의 옛 이름이고, 소그드는 중계무역으로 밥먹고 살던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드, 부하라 일대의 옛 지명이다. 8세기때 울산항을 통해 당나라와 교역이 활발했고, 당나라 장안을 거쳐온 서역 상인들이 서라벌을 자주 왕래한 것으로 미뤄 실크로드의 흔적이 천 년 세월을 넘어 남아있는 현장이었다. 남의 나라 땅에 오래도 서 있었다.
실크로드 역주행이 시작됐다. 한반도가 실크로드 루트, 경주가 실크로드 도시라는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세계의 도시들을 모두 둘러본 후 마지막으로 우리 땅에서 증거를 찾는 것이 순서다. 그런데 세상은 넓고, 내 마음은 한가하지 못했다. 2012년 말 결론은 유보하더라도 일단 가까운 경주에서부터 실크로드의 흔적을 찾기로 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건 직업병에 가깝다. 기사 쓸 때도 마찬가지지만 취재할 곳은 넓고도 많고, 마감시간은 턱없이 빠르다. 그래서 동원되는 것이 추리다. 머리가 장식품이 아닌 다음에야 취재를 하다 보면 ‘촉’이 자란다. 안테나를 세워 사실관계를 역으로 확인하면 십중팔구 맞아 떨어진다. 경주를 먼저 둘러보면 물증은 부족하더라도 심증은 잡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오만이 똬리를 틀었다.
괘릉의 돌깡패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경주로 벚꽃구경을 가면 예외없이 들리는 곳이 한 군데 있다. 천마총이 있는 대릉원과 첨성대, 반월성 주변을 거닐다 으레 국립경주박물관으로 발길을 돌리곤 했다. 건물 한 켠에다 경주의 과거를 암매장한 박물관을 보고 나면 신라를 통째로 다운로드했다는 착각으로 뿌듯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날의 동선은 달랐다. 정문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지면 야외 전각에 에밀레종으로 알려진 성덕대왕신종이 나온다. 다시 왼쪽으로 꺾어지면 월지관. 바로 그 앞쪽 야외 잔디에 커다란 돌덩어리가 하나 놓여져 있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수 십년 간 뻔질나게 다녔던 박물관이지만 그동안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돌덩어리였다. 바로 이곳에 사산조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은 입수쌍조문이 있었다. 나무를 중심으로 양쪽에 새가 있는 무늬다. 석조의 특성상 색도 바랬고 형태도 뚜렷하지 않았지만 학계에서 그렇다고 하니 믿을 수 밖에.
그 입수쌍조문을 두 눈으로 확인한 곳은 페르시아였다. 이란에 이스파한이라는 실크로드 도시가 있다. 2년 전 이 도시의 이맘호메이니 광장을 헤매다 모스크로 통하는 정문 위에서 입수쌍조문을 발견한 것이다. 꽃병 양쪽에 새 두 마리가 있는 변형이었지만 똑 같은 양식이었다. 기뻤냐고? 천만의 말씀이다. 길이 512m 폭 163m의 이맘 광장을 이 잡듯이 뒤져서 겨우 바둑판 크기 정도의 문양 하나를 찾고 나니 허탈감이 급습했다. 경주와 이스파한의 입수쌍조문을 사돈 맺기에는 상상력이 아니라 과대망상이 필요했다. 겨우 이 무늬 하나가 실크로드의 증거물이라니. 공소유지는커녕 증거불충분으로 기각될 판이었다. 내가 무식한 건지, 학자들이 뻥튀기를 한 건지는 확신이 들 때까지 보류했다.
불국사에서도 실크로드 흔적이 발견됐다. 1956년 절에서 경교(景敎)의 상징물인 돌십자가와 성모마리아상이 나온 것이다. 경교는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선고된 기독교 네스토리우스교의 중국 이름이다.
이만하면 경주가 실크로드 도시라고? 미안하지만 내 의심병은 증세가 깊다. 천 년 고도에서 서역과 교류한 흔적 몇 개 발견했다고 ‘경주=실크로드 도시’라고 도장 쾅쾅 찍어주기에는 불신의 벽이 높았다. 사학과 동기 녀석은 “야 인마, 너 역사 유적에 흔적이 남기 위해서는 얼마나 교류가 빈번해야 가능한 지 거꾸로 생각해봐”라며 고함을 쳐댔지만 난 성에 차지 않았다.
문명교류의 최고봉은 피가 섞이는 것이다. 이슬람이든 힌두든 우리와 피가 섞여야 제대로 통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인도 아유타국에서 금관가야 김수로왕에게 시집온 허왕옥, 아랍인으로 추정되는 처용 등이 있지만 손에 꼽을 정도다.
고려 때는 송도 벽란도를 통해 아랍세계와 교역이 활발했다. 고려 속요 ‘쌍화점’에서 만두 사러 갔더니 손목을 잡던 ‘回回아비’는 아랍인이고, 덕수 장씨의 시조도 고려 충열왕때 귀화한 아랍인 장순룡이다. 이국적인 마스크의 장동건이 덕수 장씨인 줄 알았더니 인동 장씨란다.
이래 저래 궁금증만 늘어가던 2013년 3월 난 실크로드 답사 길에 제대로 오르게 됐다. 17일간의 일정으로 ‘경북도 실크로드 1차탐험대’에 합류하는 행운을 잡은 것이다. SUV로, 버스로, 배로 경주에서 상주, 문경, 충주, 평택을 넘어 중국 웨이하이, 양저우, 수저우, 항저우, 카이펑, 정저우, 뤄양, 시안까지 육로와 해로를 잇는 답사길에 이름을 올렸다. 서해 밤바다의 별이 무수히 많은 줄 안 것도 그 때였다.jhj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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