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흥수 기자

등록 : 2017.11.28 18:00
수정 : 2017.11.29 10:22

전주 놀쇠들 사랑채에서 폼 나게 맛 보고 즐겨요


한옥마을의 맛과 멋을 느낄 수 있는 숨은 보석들

등록 : 2017.11.28 18:00
수정 : 2017.11.29 10:22

다문 한정식집의 ‘전주밥상’은 2만원이다. 조기를 빼면 1만5,000원. 전주=최흥수기자

전주 한옥마을 인근 동문사거리의 한 ‘실비집’ 외부 창에는 막걸리 국수 보리밥이 주 메뉴로 적혀 있다.

하지만 정체는 분명치 않다. 따로 가격표도 없고 술을 시키면 안주, 밥을 시키면 찌개나 밑반찬이 나오는 식이다. 주인이 바쁘면 물뿐만 아니라 술과 공기 밥도 ‘셀프’다.

지난 23일 한 테이블에선 그날 내린 첫눈을 두고 ‘올눈’인지 ‘풋눈’인지 왁자지껄하게 논쟁이 이어졌다. 50대 중반 ‘아재들’의 대화치고는 감성적이라 여겼는데, 이야기는 결국 전주의 맛과 멋에까지 닿았다. 여행객들이 늘어난 건 반갑지만 한옥마을이 정체성을 잃어가는 게 못내 아쉬운 모양이다. 전주까지 와서 한복체험하고 길거리 음식만 먹고 갈 수는 없는 법, 한때는 ‘그들만의 놀이터’였던 한옥마을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곳을 소개받았다.

발효 차 맥 잇기 20년 ‘교동다원’

오목대 바로 아래 ‘교동다원’은 1999년 주인장 황기정씨가 한국의 발효차인 황차를 알릴 목적으로 문을 연 다원이다. 녹차는 좀 알려졌지만, 황차의 맥이 끊긴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교동다원은 까다롭게 ‘다례(茶禮)’를 따지기 보다 누구나 부담 없이 편안하게 차를 즐기는 데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그래서 뜨거운 물을 담은 보온병과 찻물을 우리고 내리는 다기에 사람 수만큼 찻잔을 내주는 것이 전부다. 여기에 우리 밀로 만든 과자 몇 조각을 더한다. 그러나 여기까지 이르는 과정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편하게 차를 마실 수 있도록 다기를 직접 디자인하고 다양한 방법을 시도해 본 결과다. 모든 것이 발효차 문화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었다. 원료는 모악산 자락 주인장의 차밭에서 조달한다.

다원 입구의 꽃 장식.

내부 분위기도 아늑하다. 5,000원에 누릴 수 있는 호사다.

교동다원의 황차는 누구나 편히 즐기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황차는 굳이 내리는 법을 배우지 않아도 누구나 즐길 수 있도록 내온다.

다원은 100년 정도 된 건물이다. 내부는 들보와 서까래가 드러난 천장에 회를 바르고, 은은한 한지 조명으로 장식했다. 차 맛을 모르더라도 한옥의 분위기만큼은 고스란히 전해진다. 꽃잎을 띠운 대문 앞 돌 확엔 가끔씩 오목대에서 날아 온 산새가 목욕을 한다. 가격은 차의 종류에 상관없이 1인 5,000원이다. 시작할 때 가격 그대로인데 선뜻 올리기가 쉽지 않단다.

주인장은 청와대의 ‘아메리카노 산책’ 사진에 충격이 컸다고 말했다. “우리 차 대중화에 열을 올리고 있는데, 한옥마을에 늘어나는 커피숍이 전부 다원으로 보이는 꿈까지 꾸는데, 아메리카노라니.” 문재인 대통령이 전주에 오면 자신에게 사과해야 한다는 말을 꼭 써 달라고 덧붙였다.

멋을 짓는 한정식집 ‘다문’

한정식집 다문(茶門)은 겉보기에 그냥 수수한 한옥이다. 통유리창에 번듯한 방을 갖춘 한옥마을의 여느 한정식 식당에 비하면 오히려 초라하다. 그러나 다문은 전주의 ‘놀쇠’들에게 식당 그 이상의 공간이다.

다문 입구 간판. 현재 한정식을 판매하지만 시작은 찻집이었다.

평범해 보이는 마당과 하늘이 전주의 멋을 시연하는 공간이고 배경이다.

다문 ‘전주밥상’의 홍어, 돼지고기, 떡갈비 삼합.

다문은 1980년대 초반 학번들이 형식적 민주화가 완성된 1990년대에 ‘우리 가락으로 제대로 폼 나게 놀아보자’며 모인 아지트였다. 전통문화사랑모임을 이끈 풍류가 고 이동엽씨의 역할이 컸고, 멤버 중에는 김명곤 전 문화체육부 장관도 있었다. 소리와 풍물을 앞세운 산조축제도 5회나 열었다. 이후 한옥마을의 맥을 잇는 구심점으로 자리매김하면서 다수의 영화도 촬영하고 전주를 방문하는 귀한 손님의 발길도 이어졌다. 올해 4월 말에는 전북도청의 초청으로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납치된 조선도공의 후손 15대 심수관이 방문했다. 거문고ㆍ대금ㆍ피리 공연도 진행했는데, 연주가 끝난 후 그는 자신이 굽고 만드는 도기는 바로 ‘한국적인 소리와 달빛’이라며 눈물을 흘렸단다. 1920년대에 지은 다문의 자랑은 흙 마당과 처마 위로 보이는 하늘이다. 비가 오면 낙수 떨어지는 소리에 빠져들고, 보름이면 희롱하는 달빛에 마음을 내놓는다. 깊이 10m가량의 우물은 한번도 마른 적이 없다. 여름에는 모터로 하루 5톤의 물을 퍼내 탁족(濯足)하는데 이용한다.

소춘수 대표는 “다문은 한옥마을을 맥락 없는 관광지로 버려두지 말고 지속가능한 발전모델로 만들어 보자는 의지가 모인 곳”이라고 밝혔다. 누구일지 모르지만 다음 주인에게도 우리 문화를 사랑하는 마음이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희망도 나타냈다. 다문 ‘전주밥상’은 1만5,000원, 굴비가 들어가면 2만원이다.

부잣집 마음자리까지 옮겨온 전주전통문화연수원

전주향교 옆에는 한옥마을에 이사 온 전통가옥이 자리 잡고 있다. 현대식으로 개축하거나 새로 지은 한옥이 따라 갈 수 없는, 집 주인의 마음자리까지 옮긴 가옥이다. 안채ㆍ중간채ㆍ사랑채ㆍ별채를 각각 다른 곳에서 옮겨왔지만 전통가옥의 배치를 그대로 따랐다.

전통문화연수원의 장현식 고택.

미닫이와 여닫이 기능을 동시에 갖춘 장현식 고택의 창문.

사랑채 앞 돌 확의 크기는 집 주인의 부와 비례한다.

우선 안채와 중간채는 김제 금구면의 장현식 고택을 옮겨왔다. 장현식은 만석을 누리던 부호이자, 독립운동가 사회사업가 정치가로 이름을 떨친 인물이다. 1919년 결성된 대동단에 자금을 제공하고,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에 거금을 댄 죄로 투옥되는 고초도 겪었다.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기부하고, 당대의 예술가를 후원하는 등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 마음자리까지 옮겨왔다는 자부심은 여기서 나온다.

일자형의 사랑채 건물은 임실진참봉댁 고택이다. 도로개설로 철거 예정이던 건물을 옮겼다. 별채인 정읍고택은 보천교 본당 부속건물이었다. 1988년 내장산으로 옮긴 후 폐가로 쇠락해가는 것을 기증받아 2011년 전통문화연수원으로 이전했다. ㅁ자 구조는 보온 효과를 높이려는 북부지방 양식으로 중부 이남에서는 보기 드문 건축물이다. 고택 옆 전주동헌 역시 1934년 일제가 민간에 매각한 후, 완주군 구이면에서 전주 유씨 제각으로 사용하던 것을 2009년 옮겨왔다. 동헌이 전주를 떠난 지 75년 만에 귀환한 것이다. 전통문화연수원은 숙박을 포함한 전통문화연수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시설이지만 일반의 관람도 허용하고 있다.

대한민국 0.4%를 맛보는 전통술박물관

전통술박물관은 2002년 개관한 한국 최초 공립술박물관이자 농림수산식품부에서 지정한 첫 번째 술 교육기관이다. 현재까지 600여명의 교육생을 배출한 전통술 부흥의 메카이기도 하다.

전통술박물관 입구에 쓰인 ‘수을관’ 현판.

5,000원이면 3가지(청주+탁주+증류주) 전통술을 맛볼 수 있는 미각체험을 할 수 있다. 증류주는 이강주와 홍주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박물관 입구에는 ‘수을관(酥乙館)’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술의 고어로 쌀을 발효시킨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박물관은 다양한 술을 전시하기보다 전통술의 의미와 철학을 알리는데 주력한다. 현재 국내 술 시장에서 전통술은 0.4%에 불과하다. 막걸리와 과실주를 포함하면 10%가 넘지만, 상식과 달리 막걸리는 전통술에 포함되지 않는다. 전통술은 현지 농산물을 원료로 전통방식으로 빚어야 하지만, 시중 막걸리는 대부분 수입 쌀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전통술에서 중요한 누룩의 원료는 토종종자 잡곡입니다. 그래서 전통술을 빚는 것은 토종을 찾고 지키는 것과 같습니다.” 박일두 관장의 말이다.

박물관은 입장료가 따로 없다. 대신 5,000원을 내면 3가지 전통술로 미각체험을 할 수 있다. 5명 이상이면 ‘극초단기과정(40분)’ 강의를 듣고 누룩을 섞어 1.5리터 통에 담아갈 수 있다(2만원). 8시간 기초과정을 수강하면 집에서 동동주 정도는 담글 수 있다.

전주=최흥수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 1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