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라 기자

등록 : 2017.05.03 04:40
수정 : 2017.07.04 02:43

[캐릭터 오디세이] '살아남아서' 강한 도회적 배우 윤여정


등록 : 2017.05.03 04:40
수정 : 2017.07.04 02:43

70세인 윤여정은 tvN '윤식당'에서 짧은 반바지에 선글라스를 착용하는 등 젊은 패션을 선보인다. tvN 제공

서른 넘으면 제아무리 갈채 받던 배우라도 서서히 주연 자리에서 물러나고, 마흔이 되면 누군가의 이모나 고모로 역할이 한정되기 일쑤다.

지천명을 넘으면 독살스러운 시어머니나, 자애로운 할머니 연기가 주어진다. 하지만 윤여정은 여자 배우에게 유난히 가혹한 한국 연예계의 현실에서 비켜서있다. 카메라 앞에 설 기회조차 얻기 힘들 고희 나이에 예능프로그램과 영화와 드라마를 가로지르며 활약하고 있다.

나이 따지지 않는 쿨한 인텔리 여성

생물학적 나이는 그저 숫자일 뿐. 윤여정은 화면 속에서 할머니가 아니라 후배들과 놀 줄 아는 ‘언니’다. “살림을 놓은 지 오래”라 ‘윤식당’의 조리대 앞에서 쩔쩔 매다가도, 물만두를 튀겨 새 메뉴를 개발하거나 시식용 햄버거로 길거리 마케팅에 나서는 등 매사 적극적이다. 나이를 벼슬로 삼지 않으며 후배와 수평적으로 소통한다. 젊은 세대가 부러워할 영어실력을 뽐내며 노년 인텔리의 면모도 풍긴다. 그의 매력은 시청률이라는 수치로 드러난다. 윤여정을 중심에 둔 tvN 예능프로그램 ‘윤식당’은 첫 회 시청률 6.2%(닐슨코리아 유료 플랫폼 기준)를 기록하더니 지난 28일 6회 방송에서 14.2%에 이르렀다. ‘윤식당’의 이진주 PD는 “윤여정은 생각이 젊고 말도 재미있게 한다”며 “오래 서 있어서 발목이 부어도 ‘쉬겠다’는 말 한마디 없이 젊은 출연자와 같이 움직이니 시청자도 일하는 윤여정을 편하게 보는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윤여정은 이미 유명한 패셔니스타다. tvN '꽃보다 누나' 출연 때도 스니커즈에 청바지를 착용하는 세련된 패션을 선보였다. tvN 방송화면 캡처

윤여정은 2030세대에게 거부감이 없는 노년 스타다. 방송에서 며느리에 대한 불만이나 젊은이에게 훈계를 늘어놓곤 하는 여느 노년 연예인과 달리 개방적이다. 그의 열린 사고는 tvN 예능프로그램 ‘꽃보다 누나’(2013)에서 특히 빛을 발했다. 그는 “내가 처음 살아보는 거잖아. 나 67살 처음이야. 아쉬울 수밖에 없고 아플 수밖에 없고 계획을 할 수가 없어”라는 말로 세대를 아우르는 공감을 얻었다.

배우 윤여정은 영화 '죽여주는 여자'에서 성매매 여성 '박카스 할머니'로 열연했다. 극중 '박카스 할머니'는 "죽여달라"는 단골 손님의 부탁을 들어주게 되면서 혼란에 빠진다. 영화 스틸 이미지

“이렇게 늙고 싶다”… 여배우의 롤모델

윤여정의 행보는 배우 초년시절부터 남달랐다. 1966년 동양방송(TBC) 탤런트로 연예계에 발을 디딜 때부터 칼칼한 목소리와 전통적인 미녀상과 다른 외모 때문에 개성파 배우로 분류됐다. 김기영(1919~1998) 감독의 눈에 띄어 출연한 영화 ‘화녀’(1971)로 그의 개성은 도드라졌다. 가정부로 입주한 집 남자와 관계를 맺고 남자의 아들을 살해하는 명자 역은 기괴하고도 섬뜩했다. 윤여정은 비슷한 시기 데뷔해 ‘여배우 트로이카’로 전성기를 누렸던 윤정희와 문희 남정임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최고 배우 또는 충무로 간판이라는 수식을 얻은 적은 없으나 그처럼 51년 동안 꾸준히 다채롭게 연기 활동을 이어온 배우도 드물다. ‘강한 배우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배우가 강하다’는 격언이 있다면 윤여정에게 알맞다.

카메라 밖 개인사는 모던하면서도 쿨한 윤여정의 이미지를 강화했다. 윤여정은 당대 청춘을 사로잡던 가수 조영남과 1972년 부부가 됐고 바로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15년 결혼 생활이 파경에 이른 뒤 브라운관에 복귀할 때 윤여정은 높은 사회적 장애물과 마주해야 했다. 전통사회의 고지식함이 강했던 1980년대 ‘이혼녀’의 텔레비전 출연은 암묵적인 금기였다. 여의도를 쥐락펴락했던 김수현 작가의 지원이 없었다면 그의 복귀는 쉽지 않았다는 게 방송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평탄치 않은 삶은 까다롭고 꼼꼼하면서도 세태에 휘둘리지 않는 도회적 이미지를 구축했고 이는 말기암에 시달리는 늙은 남편을 두고 새 사랑을 도모하는 노부인 홍병한(‘바람난 가족’·2003), 세상에 거칠 것 없는 재벌 2세 백금옥(‘돈의 맛’·2012)으로 활용된다. 10·26 사건을 소재로 한 정치 풍자 영화 ‘그때 그사람들’(2005)의 냉소적이면서도 퉁명스러운 내레이션도 이런 이미지에 기댄다. 홍상수 감독이 ‘하하하’(2010)와 ‘다른 나라에서’(2012)에 윤여정을 캐스팅한 것도 도회적 면모와 무관치 않다.

배우 윤여정은 영화 '돈의 맛'에서 비서 노릇을 하는 영작(김강우)을 탐하는 재벌가 안주인 역으로 파격적인 정사 장면을 연기했다.

윤여정은 김기영 감독의 영화 ‘화녀’(1971) 출연을 계기로 그 다음해 김 감독의 영화 '충녀'에도 출연했다.

도회적이고 세련된, 그러나 무정형의 연기

세계의 명우 이사벨 위페르와 연기 호흡을 맞추고 한 해 두 편의 영화로 60대 중반에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 레드카펫을 밟은 윤여정의 이미지는 이후 영화와 드라마와 예능프로그램에서 활용되고 재생산된다. 윤여정이 출연한 ‘여배우들’(2009)과 ‘죽여주는 여자’(2016)의 이재용 감독은 “중년이 되면서 포기하는 것들이 있는데, 윤여정은 그걸 놓지 않고 여성으로서 품위를 지키려고 한다”고 말했다. 자신의 가치관이나 외적인 부분까지 관리하니 그런 성향이 작품에도 묻어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윤여정의 연기를 모던이나 쿨 또는 도회라는 한정적인 단어로 단정지을 수 없다. 그의 연기는 무정형에 가깝다. ‘하녀’(2010)에서 나이 든 하녀 병식을 연기했고, ‘계춘할망’(2016)에서는 가출 뒤 돌아온 손녀에게 갖은 정성을 쏟는 해녀로 변했다. ‘죽여주는 여자’에서는 남자들에게 몸을 팔다 늙어버린, 그러나 여전히 몸을 팔아 여생을 지탱할 수 밖에 없는, 그러다 노인들의 안락사를 도와주는 ‘박카스 할머니’를 맡았다. KBS2 ‘넝쿨째 굴러온 당신’(2012)에서 그는 한 많은 어머니 엄청애가 됐다. 제작 중인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에서는 복싱선수 아들과 지체장애 아들을 둔 여인을 맡아 부산 사투리를 배우고 있다. 정석희 대중문화평론가는 “윤여정은 파격적인 팜므파탈부터 헌신적인 어머니까지 모든 성격의 역할이 소화 가능한 듯하다”며 “평소 패션 감각이나 사고방식이 세련됐기 때문에 다양한 이미지로 변신해도 대중에게 부담이 없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소라 기자 wtnsora21@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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