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12.05 14:00
수정 : 2017.12.05 17:46

[애니북스토리] “살고 싶었다” 자신을 겨눈 총구를 부여 잡은 라쿤


등록 : 2017.12.05 14:00
수정 : 2017.12.05 17:46

정말 한심했다. 스스로에게 이렇게 심하게 실망하기도 오랜만이었다. 동물권 관련된 책을 내고, 동물 학대와 동물에 대한 비윤리적인 태도에 대해 글을 쓰면서 그것도 몰랐다니 한참 부족한 인간이었다.

몇 년 전, 겨울 외투가 낡아서 겨울 점퍼를 장만했다. 무거운 옷이 부담스러워서 가볍고 따뜻하다는 거위 털 소재의 점퍼로 골랐다. 또 모직 코트를 구입하면서 “모피가 들어간 부분은 없죠?”라고 물으며 동물에 해를 끼치지 않은 소비를 한다고 생각했다. 밍크 털, 여우 털 등 동물의 털이 확연히 보여야만 모피라고 생각했다.

동물의 털이 확연히 보이지 않아도 모피가 사용된 제품이 많다. EBS 다큐멘터리 ‘하나뿐인 지구 - Our sole earth 당신의 겨울 외투, 알파카와 라쿤’유튜브 캡처

그러다가 털을 채취하기 위해 양과 거위가 어떻게 사육되고, 털을 깎고 뽑는 과정이 얼마나 잔인한지 알게 되자 저 옷들을 어찌하나 딜레마에 빠졌다. 또 다른 소비를 하기 보다는 미안한 마음을 갖고 낡을 때까지 사죄하는 마음으로 오래 입자고 결심했다. 그러다가 겨울 외투의 모자에 라쿤 털이 많이 쓰인다는 것을 또 알게 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점퍼의 라벨을 살폈는데 ‘리얼 라쿤 퍼(REAL RACCOON FUR)’라고 적혀 있었다. 그간 입었던 겨울 점퍼의 털이 다 인조털이라서 의심도 하지 않았는데 이게 진짜 동물 털이라니.

라쿤이 자신을 겨눈 사냥꾼의 총구를 부여 잡고 있다. EBS 다큐멘터리 ‘하나뿐인 지구 - Our sole earth 당신의 겨울 외투, 알파카와 라쿤’ 유튜브 캡처

내가 본 영상 속에서 라쿤은 손을 뻗어 사냥꾼이 쏴 죽이기 위해서 내민 총구를 부여잡고 있었다. 그토록 절실하게 살고 싶어 했던 생명체의 털이 내 점퍼에 붙어 있었다니. 아니 오히려 야생에서 잡힌 라쿤이면 나을 것 같았다. 현재 세계 모피의 최대 수출국인 중국에서 생산된 라쿤 털이라면, 그 털의 주인인 라쿤은 평생 몸도 펴지 못하는 철장에 갇혀 이상행동을 하다가 죽일 때 쓰이는 약물 값도 아까워서 바닥에 내팽개쳐져서 의식을 잃은 후 산 채로 가죽이 벗겨졌을 것이다. 사후강직이 오기 전에 산 채로 벗겨야 더 쉽게 벗겨지고, 털에 윤기가 살아있기 때문이다.

덜덜 떨면서 라쿤 털을 떼어낸 후 어찌할 바를 몰라서 한 동안 방 안에 두었다. 얼마나 멍청한 짓을 했는지 가슴에 돌덩이를 매단 것처럼 무거운 마음으로 반성하다가 마당에 묻었다. 지금도 나처럼 모르고 라쿤 털이 달린 겨울 외투를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들도 라쿤 털이 어떻게 생산되는지 그 과정을 한 번 알아보면 좋겠다. 그 이후에 어떤 선택을 할지는 각자의 몫이고.

사람들이 라쿤 모피가 어떻게 생산되는지 알아보았으면 좋겠다. 이후의 선택은 자기 몫이다. 동물보호단체 페타 (PETA) 유튜브 영상 캡처

동물의 학대로 얻은 상품을 알게 모르게 소비하고, 오락으로 즐기는 사람들에게 그 생명체가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지 전달하는 게 내가 동물 책을 내고, 동물단체가 하는 일이다. 그런데 야생동물은 일상적으로 접하는 동물이 아니다 보니 대중을 설득하기가 어렵다. 환경윤리학자 알도 레오폴드는 “우리는 우리가 보고, 느끼고, 이해하고, 사랑하고, 믿음을 갖는 것들에 관해서만 윤리적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눈에 보이지 않고 사랑을 느끼지 못한 대상에게는 윤리적이기 어려워서 야생동물 문제는 반려동물 문제만큼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그런데 2017년 한국에서 야생동물인 라쿤은 이외로 우리 가까이에 있다. 바로 라쿤 카페, 동물 카페 덕이다.

동물단체 어웨어는 최근 전국 야생동물카페의 운영 현황을 조사한 <야생동물카페 실태조사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를 보면 동물카페가 급속도로 확대되는 상황 속에서 초창기 동물카페가 반려동물을 동반하고 가던 곳이었다면 지금은 야생포유류, 파충류 등을 사육, 전시하는 형태로 변화하고 있다. 그 중 눈에 띄는 것은 라쿤이다. 조사 대상인 35곳의 동물카페 중에서 가장 많이(29곳) 사육되고 있었다.

동물카페에서 가장 많이 사육되는 동물은 라쿤이다. 어웨어 페이스북

동물 카페를 찾는 이들의 목적은 당연히 직접적 접촉이다. 직접 먹이고, 만지고 싶은 욕구를 갖고 동물카페를 찾고, 그런 방문객의 요구에 맞게 라쿤은 피할 곳이 없는 공간에서, 소음과 불빛을 참으면서 매일 10~14시간 노출되어 있다. 자주 먹고 배출하면 냄새가 나므로 급수도 제한하고 있는 곳이 많았다. 이처럼 그들을 괴롭히면서까지 접촉하고 싶은 동물이 된 라쿤. 그렇다면 레오폴드의 생각을 빌리자면 우리는 라쿤을 예전에 비해서 더 가깝게 지내며 사랑하게 되었으니 예전보다 더 엄격한 윤리적 고려의 대상에 포함시켜야 한다. 같은 동물을 동물 카페에서는 만지고 사랑하다가 카페를 나설 때는 그들을 죽여 만든 털이 달린 점퍼를 입는 건 모순이 아닐까. 동물 카페와 모피로 어느 때보다 우리 일상 깊숙하게 들어온 야생동물 라쿤이 올 겨울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참고: 야생동물카페 실태조사 보고서, 동물복지문제연구소 어웨어

김보경 책공장더불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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