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윤 기자

등록 : 2018.02.10 14:00
수정 : 2018.02.11 09:56

[인물 360˚] “우리는 역마살 낀 관심종자” 여행에 미친 사람들


등록 : 2018.02.10 14:00
수정 : 2018.02.11 09:56

여행에 미치다가 제작한 <세 훈남의 다이나믹한 홍콩여행>중 한 장면. 홍콩관광청 여행에 미치다 제공

2018년 2월 8일 서울 압구정동의 여행에 미치다 본사에서 (왼쪽부터)안대훈 총감독, 이승아 PD, 홍성륜 매니저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박지윤 기자

따뜻한 물이 쏟아지는 호텔 욕실, 이제 막 샤워를 마친 채 젖은 머리를 털던 한 근육질의 남성이 화면 밖 당신에게 끈적하게 말을 건다.

“오늘… 홍콩 갈 준비 됐어?” 예기치 못한 ‘살색’의 향연에 정신이 혼미했던 것도 잠시, 난데없이 발랄한 두 남자의 목소리가 끼어든다. “으응~” “나두우~”. 경쾌한 비트의 음악이 흐르자 세 명의 ‘팔팔’한 젊은이들이 눈부신 이국 풍경 속을 거침없이 활주한다. 사시사철이 뜨겁게 화려한 도시 ‘진짜 홍콩’의 모습이다.

2016년 11월 페이스북에 업로드 된 <세 훈남의 다이나믹한 홍콩여행> 영상은 여행 콘텐츠계의 ‘레전드 중 레전드’로 불린다. 2018년 현재 기준 조회수 384만회를 기록, ‘페이스북 유저라면 누구나 한번씩은 봤을 영상’ 중 하나로 꼽힐 정도. 효리 언니가 사장인 민박집도 유미 누나가 서빙하는 레스토랑도 나오지 않지만, ‘비글미’ 넘치는 옆집오빠들의 천방지축을 구경하는 듯한 느낌에 왠지 더 눈길이 간다.

언뜻 보기엔 우정여행을 떠난 10년지기 동갑내기들 같지만, 사실 영상 속 이들은 페이스북 페이지 <여행에 미치다>의 크리에이터들. 나이도 제각각, 살아온 이력도 다르지만 ‘여행’에 매혹됐다는 이유로 한 데 뭉쳤다. 4년 전 팔로워 수 30명으로 시작한 <여행에 미치다>는 ‘재야의 여행고수’들을 끌어 모으며 무럭무럭 성장해 어느덧 팔로워 수 187만명을 자랑하는 대한민국 최대 ‘여행 플랫폼’으로 자리매김했다. 이젠 16명의 전담 프로듀서와 에디터를 거느린 어엿한 ‘미디어 스타트업’. 일년이면 24면짜리 여권 한 장이 그대로 거덜난다는 이 회사의 직원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스스로를 ‘역마살 낀 관심종자’라고 소개한 유쾌한 이들을 만나봤다.

2018년 2월 1일 서울 압구정동의 여행에 미치다 본사에서 만난 조준기 대표. 박지윤 기자

처음부터 ‘미쳤던 건’ 아니었다

시작은 거창하지 않았다. <여행에 미치다> 페이스북 페이지는 2014년 봄, 도서관에 앉아 멍 때리기 바빴던 한 청년의 손에서 뚝딱 탄생했다. 당시엔 스물 다섯의 취준생이었지만 지금은 <여행에 미치다>의 대표가 된 조준기(29)씨다.

“전공인 무역학을 살려 한 공기업에서 캐나다 현지 인턴십을 했어요. ‘이제 진짜 내가 원했던 일을 한다’는 기대에 부풀었던 것도 잠시였죠. 말로만 들었던 ‘학벌주의’의 벽은 생각보다 높았어요. 일을 하면 할수록 차별을 실감했죠.”

‘죽을 만큼 노력해도 결국은 별볼일 없이 불행해지는 건 아닐까’. 조직에선 답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순간, 현지인들의 삶이 보였다. ‘어떤 직장을 다니는가’로 존재를 결정짓지 않는 곳에서 모두가 능력껏 일하고 일상의 여유를 즐겼다. ‘일단 번듯한 곳에 취직만 하면 더 나아지겠지’라 위안하며 오늘의 행복을 내일로 미루던 자신에게 물었다. “나는 지금 행복한가.” 빛나는 홍콩의 야경 사진을 보고 ‘떠도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무작정 결심했던 열여덟 살의 자신이 떠올랐다. 결국 그를 강하게 이끈 건 ‘여행’이었다.

사이판을 여행중인 여행에 미치다 조준기 대표. 조준기 대표 제공.

그렇게 여행을 꿈꾸고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커뮤니티, <여행에 미치다>가 만들어졌다. 준기씨와 똑 닮은 청춘들이 모여들었다. ‘세 훈남의 홍콩여행’ 영상을 고안해 낸 안대훈(30)씨의 사연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이탈리아 로마에서 3년간 투어 가이드로 일했지만,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 이야기를 하는 게 익숙지 않았다. 그에겐 ‘고역의 날들’이었다. 사그라들었던 의욕은 로마를 떠나는 순간 돌아왔다. 이탈리아의 숨은 풍경을 더 널리 알리기 위한 ‘여행 영상’을 찍기로 결심하면서부터다. 그 때 만들어진 <두 남자의 이탈리아 여행기>영상은 여행에 미치다 페이지에 소개되며 유명세를 탔다. ‘우리도 여행가서 이런 거 찍어볼래?’ 너도나도 따라 해보고 싶다는 반응이 이어졌다. 말하자면 ‘세 훈남 홍콩여행’의 시험버전이었던 셈이다.

“막상 가이드 일을 그만 두고 한국에 돌아와선 좀 막막했어요. 한동안 명품 숍에서 세일즈를 하기도 했는데, 그 때 알았죠. 내가 원치 않는 일을 하면서 사는 게 이렇게 힘든 거구나.” 결국 ‘마음’이 이끄는 대로 가기로 했다. 그렇게 대훈씨는 <여행에 미치다>의 일원이 됐다. 특유의 개성 있는 감각으로 여행지의 매력을 담아내는 대한민국 1호 ‘여동(여행동영상) 전문 감독’이다.

여행에 미치다 페이스북 배너

“어? 나도 할 수 있겠네?” “어! 너도 할 수 있어!”

몇 년에 한번, 큰 마음을 먹어야 떠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패키지보단 자유여행이, 호화여행보단 배낭여행이 매력적인 시대. 조준기 대표는 돈은 없어도 떠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 2030 세대만의 ‘개성 있는 여행 스토리’를 기대했다. 단돈 350만원을 들고 141일간 세계를 여행한 스물 두 살 여대생 안시내씨의 스토리가 페이지에 소개되자 호응은 폭발적이었다. “’젊은 친구가 그 적은 돈으로 세계 여행을? 어? 나도 갈 수 있겠네?’하는 문화가 그 때 시작됐어요. 자기 여행기를 페이지에 올리고 싶다는 희망도 쏟아졌죠. 그 중 하나가 바로 승아씨의 8개월간의 세계일주 스토리였어요.” 조준기 대표와 이승아(25)작가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스물셋, ‘지금이 아니면 두 번은 없다’는 생각으로 249일 동안 지구 반 바퀴를 누빈 이승아(25)씨는 여정 내내 자신의 여행기를 <여행에 미치다>에 연재했다. 또래들에게 폭발적인 반응을 얻어 지난 해 4월 <쫄보의 여행>이라는 책으로 엮이기도 했다. 본인이 말하는 인기비결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솔직함’이다. 여행자금 1300만원을 마련하기 위해 9개월 간 이어온 알바 생활은 ‘지지리 궁상’이었지만, 그렇게 큰 맘 먹고 떠난 여행은 막상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다. 혼자 하는 것에 익숙치 않았던 그녀가 ‘프로혼행러’로 거듭나는 과정을 고스란히 담은 이야기는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스카이 다이빙에 도전했지만 말 그대로 ‘스카이(Sky)’에서 다이(die)’할 뻔 했다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부터 사무치는 외로움에 지쳐 이틀 내내 호스텔 밖으로 한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던 경험까지. 한껏 찌질했던 순간들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 와중에 여행책자에 없는 ‘쏠쏠 정보’도 빼놓지 않는다. ‘악명 높은 볼리비아 설산 트래킹은 과연 죽을 만큼 힘든가, 견딜 만 한가’, 오직 직접 경험해 본 사람만이 말해줄 수 있는 ‘꿀팁’이다.

“멋져요, 환상적이예요, 낭만이 가득해요! 책이든 예능이든 여행에 관련된 것들은 다 그렇잖아요. 철썩같이 믿었다가 막상 가보면 저는 배신감이 더 크던데.(웃음) 제 얘긴 와~소리 나는 대단한 스토리가 아니예요. 그냥 내 주변에 있을 법한 누군가의 이야기죠.”

조준기 대표는 이것이 바로 ‘여미스러움’이라고 말한다. 언제든 ‘자기 자신’을 대입할 수 있는 아마추어적인 것, 그래서 누구나 ‘나도 콘텐츠를 만들고 싶다’고 느끼게 하는 것. <여행에 미치다>가 채널이 아닌 플랫폼을 지향하는 이유기도 하다.

<쫄보의 여행> 저자인 이승아 작가. 볼리비아 우유니 사막 여행 당시의 모습. 이승아 페이스북.

여행 콘텐츠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다

“세 훈남의 다이나믹한 홍콩 여행은 사실… 홍콩 관광청의 의뢰를 받아 제작한 네이티브 애드(Native AD)예요. 어? 홍콩 광고인지 몰랐는데 홍콩이 너무 가고 싶네? 이게 포인트죠.”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여행 동영상이 마케팅의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일반인이 만드는 콘텐츠를 관광청이나 기업과의 제휴에 접목시킨다는 발상은 <여행에 미치다>가 처음이었던 것. 제작 방식도 기존 관행과는 딴판이었다. 분초 단위로 만든 콘티도 클라이언트의 승인도 없었다. 대훈씨의 일행이 출발할 때 정해져 있던 것은 오직 숙소와 일정뿐. “홍콩 갈 준비됐어?”로 시작하는 야릇한 오프닝도 즉석에서 떠올린 아이디어였다. 난생 처음 보는 새로운 광경을 만날 때 느끼는 ‘순도 100%’의 설렘, 오직 그 감정만을 살리자는 게 목표라면 목표였다.

홍콩 영상을 기점으로 기존 관광 콘텐츠의 패러다임이 완전히 뒤집어졌다. ‘세 훈남’ 시리즈는 라오스, 발리, 방콕편으로 이어졌다.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세팅된 아이돌 대신 셀프 카메라를 거칠게 흔들며 걷는 청년들의 모습이 담겼다. 첫 제휴의 성공 이후로 러브콜이 물밀듯 들어왔지만, <여행에 미치다> 제작진은 나름의 철칙을 세웠다. ‘제휴사는 돈벌이 수단이 아니라 동반자다. 광고임을 떠나 그 자체로서 꽤 괜찮은 즐길거리가 돼야 할 것.’ 상품의 과도한 노출을 요구하는 제의는 단칼에 거절했다. “이상하게 클라이언트의 요구사항이 조금이라도 많았던 콘텐츠는 잘 안 됐어요. 우리만의 발칙한 개성이 날 것으로 드러난 영상이 잘 먹혔죠.” ‘180만명의 시어머니’ 같은 구독자들의 지속적인 애정을 받을 수 있는 비결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세 훈남의 다이나믹한 홍콩여행> 후속편 촬영을 위해 발리로 떠난 여행에 미치다 안대훈 감독팀. 여행에 미치다 제공.

‘한달 살아보기’ 8개국으로 날아갑니다

‘세 훈남 시리즈’에서 ‘꽁지머리 그 남자’로 불리는 주인공 홍성륜(28)씨는 지난 해 <여행에 미치다>에 오프라인 프로젝트 담당으로 입사했다. 대학생 시절, 파티 기획 분야에서 일했던 경력을 십분 살린 것. 온라인에만 치우쳐 있던 네트워킹 사업을 ‘오프라인’으로 확장시켜 보고 싶다는 것이 그의 포부다.

올해 첫 프로젝트는 ‘트레블 에세이 릴레이’다. 백지인 35권의 책을 35명의 여행자에게 배부, 빈 페이지에 자신의 이야기를 담고 다른 여행자에 넘겨주는 식의 이벤트다.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형식은 자유. 1년 간 이 책을 거쳐간 여행자들의 이야기가 차곡차곡 담길 것이다. 책의 맨 앞장엔 “2019년 1월 1일까지 <여행에 미치다> 사옥으로 돌려보내 줄 것”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무사히 돌아온다면 여기에 담긴 이야기를 바탕으로 책을 출판하거나 영상 콘텐츠를 제작할 생각이다. 모든 수익금은 형편이 좋지 않아 여행을 꿈꾸지 못하는 학생들의 ‘여행자금’으로 지원한다. ‘한국어 낙서 지우기 원정대’를 만드는 것도 목표 중 하나다. 세계 각국의 문화재 위에 그려진 한국어 낙서를 지우기 위해 유명 관광지에 ‘특파원’을 보내는 것. 벌려놓은 일들이 많아 아직은 ‘구상 단계’에 불과할 뿐이라지만 ‘미래’를 이야기하는 그들의 눈빛엔 의욕이 넘친다. “이제 막 미디어 기업으로 성장해 나가려는 시기인 만큼, 해보고 싶은 것들이 많아요. 가장 해보고 싶은 건 사회적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사업 모델을 만드는 거죠.”

서울 압구정동의 여행에 미치다 본사 풍경. 세계 각지에서 모아온 마그넷이 눈길을 끈다. 박지윤 기자

서로를 ‘역마살 낀 관심종자’라고 부르는 이들은 쏟아지는 팬들의 ‘관심’에 힘입어 올 6월 전 세계로 ‘한달 살아보기’ 프로젝트를 떠난다. 16명의 전 직원들이 2명씩 짝을 지어 8개국으로 날아간다. 조준기 대표는 오세아니아, 안대훈 감독은 동남아, 홍성륜 매니저와 이승아 작가는 유럽에서 <여행에 미치다> 구독자들을 대신해 ‘여행지에서 살아보는 낭만’을 대신 이뤄줄 예정이다.

이들은 말한다. 여행을 ‘꿈꾸기만’ 하는 사람들에게 여행이 ‘일상’이 되는 삶을 만들어 주고 싶다고. 왠지 이들의 경쾌한 ‘역마살 여정’은 종착지가 없을 것 같다.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여행에 미치다에서 제작한 여행용품과 여행달력. 박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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