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권일 프리랜스 저널리스트

등록 : 2016.11.18 11:00

[박권일의 글쟁이 페달] '자태기'를 아시나요


등록 : 2016.11.18 11:00

권태기엔 방치된다.

‘자태기’라는 말이 있다. ‘자전거+권태기’다. 자전거 취미생활을 하다 보면 누구나 한번쯤 권태기를 겪기 마련이다.

촉 좋은 독자들은 이미 눈치채셨으리라. 그렇다. 내가 지금 자전거 권태기의 한 가운데 있다. 늦여름 무렵부터 이런저런 일로 바빠져서 통 자전거를 못 탔고, 그러다 보니 몸은 퉁퉁 불어나고, 살이 찌다 보니 자전거 타긴 더 힘들어지고, 다시 몸은 더 불고…. 아무튼 참으로 ‘일목요연한’ 과정을 거쳐 자태기에 들어섰다. 하지만 자전거라는 취미를 그만두진 않을 것이다. 10년 동안 자전거를 타면서 이 정도 권태기를 여러 번 겪어봤다. 이번 권태기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도 잘 안다. 그리 심각하지 않다. 아마 다시 동료들과 자전거를 신나게(그러니까 ‘죽도록 힘들게’) 몇 번 타면 금방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게다.

경력이 얼마 되지 않는 라이더들은 권태기 한번 오면 곧장 자전거를 접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보다 많은 케이스는 갑자기 ‘필’ 받아 자전거를 사고 한강에 나갔다가 극심한 안장통에 밤새 고통 받고 다음날 중고장터에 팔아버리는 경우다. 이런 사례를 제외해도 자전거 권태기를 겪는 사람들은 부지기수다. 커뮤니티 게시판에도 자태기에 대한 고민 상담이 심심찮게 올라온다. 모르는 이들에겐 하찮게 보이겠지만 당사자에겐 심각한 문제다. 특히 처음 겪는 이들에겐 꽤 당혹스러울 수 있다. 돈 들여 장만한 장비들을 처분하는 것 역시 만만치 않은 일이기도 하다. 관찰해온 결과, 권태기라고 해서 다 같은 게 아니었다. 대략 다섯 가지로 유형화해 볼 수 있었다.

첫째, 부상공백형이다. 자전거를 타다 불의의 사고로 다친 뒤 어쩔 수 없이 자전거 타기를 중단하게 된 라이더가 그대로 권태기에 들어서는 경우다. 경미한 부상인 경우 치료기간 중에도 자전거를 타고 싶어 안달을 내다가 금방 다시 복귀하곤 한다. 하지만 제법 큰 부상인 경우 사고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기기도 하고 그 때문에 복귀한 다음에도 예전처럼 자전거를 즐기지 못하다가 결국 자전거 타기를 그만두게 된다. 가장 안타까운 유형.

둘째는 워커홀릭형이다. 생업이 너무 바빠서 도무지 자전거 탈 짬을 내기 어려운 경우다. 아이가 생겨 육아에 전념해야 한다든가 하는 사례도 여기 포함된다. 아무튼 다른 일 때문에 물리적으로 자전거 탈 시간 자체를 내기 힘들 때 권태기에 빠지기 쉽다. 물론 일이 많으면 수면시간을 줄여서라도 자전거를 타는 에너지 넘치는 이들도 없진 않지만, 대개는 생활의 무게에 짓눌려 자전거를 포기하게 된다. 가장 흔한 유형이고 그래서 동호인들에게 가장 공감을 얻는 유형이다.

장비 '끝판왕'의 한 사례

셋째는 물욕상실형이다. 장비에 대한 집착, 소위 ‘장비병’이 심한 사람들에게 흔한 유형. 프레임이라든가, 휠, 각종 용품들을 사 모을 때는 열정을 불태우다가 어지간한 장비를 전부 다 갖췄을 때, 또는 이른바 ‘끝판왕’이라 불리는 초고가 자전거를 샀을 때 갑자기 권태기가 찾아온다. 이 유형의 사람들은 다른 취미로 넘어가도 비슷한 권태기를 겪는 경우가 많다.

넷째는 힙스터형이다. 이것은 마치 화전민처럼 ‘힙’한 취미를 찾아 다니는 사람들이 겪는 권태기로, 엄밀히 말하면 권태기라 분류하기도 애매하다. 권태기란 멀어져 가거나 냉담해지는 기간으로, 일종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힙스터는 어느 순간 다른 취미로 이동해 있다. 거기에 고민하는 과정 같은 건 없다. ‘무엇이 지금 힙한가’에 대한 판단과 결과만 있을 뿐이다.

태워버렸어 하얗게.

다섯째는 ‘내일의죠’형이다. 오랫동안 자전거를 타왔고, 실력도 출중하며, 매너와 지식 무엇 하나 빠질 게 없는 동호인이 어느 날 장비를 모두 팔고 홀연 취미를 그만두는 경우가 있다. 희미하게 웃으며 “태워버렸어, 새하얗게…”를 읊조리는 느낌이랄까. 제3자가 보기엔 힙스터형처럼 ‘멀어지는 과정’이 보이지 않지만, 사실 이 유형은 하나의 취미에서 일가를 이룬 이들이 겪는 권태기이기 때문에 감히 하수가 쉽게 평가할만한 것은 아니다.

사랑처럼 취미에도 권태가 찾아든다. 우리는 그 자체를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문득 찾아온 권태를 어떻게 다루고 현명하게 넘기는가는 각자의 몫이다. 내가 자전거를 타며 배운 것은 내 삶의 밀물과 썰물을 대하는 법이었다. 어쩌면 권태를 다루는 방법이야말로 삶을 돌보고 배려하는 가장 중요한 기술일지 모른다.

프리랜스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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