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박서강 기자

김주영 기자

등록 : 2017.11.23 04:40
수정 : 2017.11.23 07:23

바뀐 건 유니폼 뿐…용역근로자의 끝없는 ‘리셋’ 인생

[View&]유니폼ㆍ로고ㆍ명함에 담긴 용역근로자의 비애

30년 일터에서 여전히 신입사원

회사 로고 본인이 교체하기도

실직 걱정에 연말마다 불안

고용승계 되도 경력 강제 리셋

용역 근로자인 이화여대 환경미화원 김명숙(70)씨는 고용주가 바뀔 때마다 새로 지급된 유니폼을 입었다. 지난 30년간 유니폼 외에 일터도 업무도 달라진 것이 없다. 사진 속 세 명의 김명숙씨가 입고 있는 각기 다른 유니폼은 고용주만 바뀔 뿐 처우나 근로여건은 제자리인 용역 근로자의 불합리한 현실을 상징한다. 왼쪽부터 ‘ㅇ’사(2002년~2011년), ‘ㄷ’사(2012년), ‘ㅅ’사(2013년~현재)의 유니폼을 입고 같은 장소에서 촬영한 세 장의 사진을 이어 붙였다.

같은 장소에서 촬영한 다른 포즈의 사진.

하청업체 소속으로 원청 사업장에서 일하는 용역 근로자들은 근로 계약 때마다 강제로 ‘리셋(Reset)’ 당하는 경험을 한다. 한 일터에서 오래 일하며 쌓은 경력이 계약과 동시에 ‘없던 일’이 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근속 연수가 인정되지 않으니 임금 인상도 기대하기 어렵다. ‘만년 신입사원’이라는 그들의 자조가 무리는 아니다. 

이런 재계약이라도 할 수 있으면 다행이다. 만약 고용주가 원청과의 용역 계약에 실패할 경우 곧바로 실직 위기가 닥친다. 우여곡절 끝에 고용승계가 돼도 소속업체가 자주 바뀌다 보면 저임금과 고용불안에서 헤어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일을 하면 할수록 제자리 걸음을 걷는 그들이 정든 일터에서 경험하는 변화라곤 고용주가 바뀔 때마다 달라지는 유니폼과 소속업체 로고 패치, 그리고 명함뿐이다. 

김명숙(오른쪽)씨가 이대 교내의 한 환경미화원 휴게실에서 동료 직원과 과거에 입었던 유니폼을 놓고 담소를 나누고 있다.

#1 30년 환경미화원의 유니폼

이화여대 환경미화원 김명숙(70)씨가 고용주가 바뀔 때마다 지급받은 유니폼을 입고 카메라 앞에 섰다. 김씨는 1988년 이대에 직접 고용된 이후 30년째 한 직장에서 일하고 있다. 학교가 청소 업무를 외주화할 무렵인 2002년 김씨는 이대를 퇴직하고 용역업체 ‘ㅇ’사에 입사했다. 장기 계약을 이어 가던 ‘ㅇ’사가 2012년 용역 계약에 실패하면서 ‘ㄷ’사로 고용이 승계됐고, 1년 후인 2013년부터 현재까지 김씨는 ‘ㅅ’사에 소속돼 있다. 

김씨는 “같은 직장에서 같은 일을 그렇게 오래했어도 내 근속 연수는 항상 1년이었다”고 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밑바닥 일이라지만 30년차나 신입이나 임금이 십원 한 장 안 틀리고 똑 같다니…” 서운한 듯 말끝을 흐리던 그는 “재계약이 있는 연말이면 항상 불안했는데 올해는 그런 게 없어 좋다”며 웃었다. 김씨는 올해 말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다.

김씨는 10여년 전 입던 유니폼을 어루만지며 “그땐 동복 하복 1벌씩만 받았기 때문에 한겨울에도 실내에서 입는 작업복을 입고 밖에서 눈을 치워야 했다”고 회고했다. 그의 30년 환경미화원 생활에 변화가 생긴 건 7년 전 노조가 생기면서부터다. 회사가 여벌 유니폼을 지급하는 등 근무 여건이 조금씩 나아졌고 시급도 올랐다.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학교 구성원의 인식도 달라졌다. 김씨는 “과거 외부 손님 초청 행사가 있을 땐 밖으로 못 나오게 할 정도로 무시당했지만 이제는 직원이나 학생 모두 우리를 한 가족으로 대해 준다”고 말했다.   

#2 유니폼에 겹쳐 꿰맨 소속업체 로고 패치

한국지엠 창원공장에서 12년째 미션 조립 업무를 하는 용역 근로자 정상민(35)씨는 최근 3년간 고용주가 3번 바뀌었다. 그 사이 변한 것이라곤 유니폼 왼쪽 가슴에 박힌 소속 업체 로고뿐이다. 정씨는 “지난해 새로 바뀐 고용주로부터 회사 로고 패치를 각자 부착하라는 지시를 받고선 ‘이제 우리 손으로 로고까지 바꿔 달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처참했다”고 했다. 불만이 있어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정씨는 손바느질로 기존 업체의 로고 위에 새 회사 로고패치를 덮고 꿰맸다.

초창기 3, 6, 9개월 단위의 쪼개기 계약과 퇴사를 반복했던 정씨는 무기계약직이 된 지금까지 매년 찾아오는 고용불안과 싸우고 있다. 노조는 작년에 이어 올해도 ‘업체 폐업 시 고용승계보장’ 등을 요구하며 천막농성을 벌이는 중이다. 정씨는 “크리스마스 때 가족과 함께 할 계획을 세우는 건 꿈도 못 꾼다. 직장이 매년 바뀌니 은행 신용등급이 낮아져 대출도 받기 어렵다”며 한숨을 지었다.   

한국지엠 창원공장 용역 근로자 정상민씨가 지난해 입었던 유니폼에서 당시 소속 업체 ‘M’사의 로고 패치를 떼어내니 이전 소속사 ‘B’사의 로고가 나왔다.

정씨는 최근 3년간 고용주가 3번 바뀌었는데 동일한 유니폼에 회사 로고 패치만 달라졌다.

인터넷 설치 기사 한모씨가 사용해 온 명함. 고용주가 바뀌어 명함을 새로 만들 땐 원청인 대기업 로고는 그대로 두고 작은 글씨의 하청업체 이름만 바꾼다. 맨 위 명함은 아예 하청업체 이름을 넣지 않은 경우다.

#3 인터넷 설치 기사의 같은 듯 다른 명함

16년차 인터넷 설치 기사 한모(40)씨의 명함엔 업체 명이 두 개다. 눈에 띄게 표시된 원청 업체 ‘LG유플러스’ 로고와 작은 글씨로 적힌 한씨의 소속 업체 이름이다. 한씨는 다른 용역 근로자들처럼 소속 업체가 6개월 또는 1년 만에 폐업하면 다른 하청 업체에 신입사원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 그는 최근 7년간 명함을 5번 바꿨다. 고용주가 바뀐 횟수만큼이다. 

한씨는 원청 업체의 무리한 실적 요구와 하청 업체의 잦은 폐업이 근로자의 피해로 직결되는 현실을 벗어나고 싶다. 소속 업체의 폐업으로 체불 임금 전부를 때일 뻔한 경험도 2차례나 했다. 그는 “임금의 많고 적고를 떠나 안정적으로 월급이 나오고 퇴직금도 차곡차곡 쌓이는 직접고용이 하루빨리 도입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강병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간접고용 노동자의 피해는 기업이 비용 부담을 줄이면서 정리해고나 업무상 재해 등의 책임을 하청업체에 전가하는 데서 비롯된다. 기업의 고용 책임을 강화하고 직접고용이 원칙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관련법 개정을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박서강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김주영기자 will@hankookilbo.com

박미소 인턴기자

김명숙씨가 일터인 이화여대에서 2002년~2011년 사이에 입은 ‘ㅇ’사의 유니폼을 입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12년 고용주인 ‘ㄷ’사의 유니폼.

김씨가 입은 유니폼은 2013년부터 현재까지의 고용주 ‘ㅅ’사가 지급한 것이다.

김씨는 정년퇴직을 앞둔 소감을 묻자 “비록 밑바닥에서 일했지만 자식 같은 학생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학생들을 보면 앞으로 더 좋아질 것 같은 희망이 있다”며 웃음을 지었다.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