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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를 보다, 경제를 읽다] 노동자는 왜 ‘혁명 파트너’ 부르주아에 배신 당했나

입력
2019.12.14 04:4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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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들라크루아가 그린 프랑스 혁명 시대 

※ 경제학자는 그림을 보면서 그림 값이나 화가의 수입을 가장 궁금해할 거라 짐작하는 분들이 많겠죠. 하지만 어떤 경제학자는 그림이 그려진 시대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생각해보곤 한답니다. 그림 속에서 경제학 이론이나 원리를 발견하는 행운을 누리기도 하죠. 미술과 경제학이 교감할 때의 흥분과 감동을 함께 나누고픈 경제학자, 최병서 동덕여대 경제학과 명예교수가 <한국일보>에 격주 토요일 연재합니다.

외젠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 프랑스 루브르미술관, 260×325㎝
외젠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 프랑스 루브르미술관, 260×325㎝

프랑스 사람들에게 7월은 각별하다. 프랑스 혁명 기념일이 7월14일이기 때문이다. 이날은 샹젤리제 대로에서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가 펼쳐진다. 트럼프 대통령조차 이 행진을 보고 나서 “미국 독립기념일에도 군사 열병식을 하겠다”고 했을 정도다. 1789년 대혁명은 바스티유 감옥을 시민들이 습격한 것을 계기로 촉발되었기 때문에 ‘바스티유 데이’라고도 불린다. 이후 1830년 7월 혁명과 1848년 2월 혁명까지 소위 ‘혁명의 시대’가 이어진다.

 ◇‘자유의 여신’이 조롱 받은 이유 

외젠 들라크루아(Eugene Delacroix, 1798-1863)가 그린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La Liberte guidant le Peuple)’(1830)은 1830년 파리에서 일어난 7월 혁명을 소재로 그린 것이다. 이 작품은 샤를10세 절대주의 체제에 대항하여 1830년 7월28일 파리 시민이 혁명을 일으킨 당시를 사실주의 관점에서 그린 것이다. 드라마틱한 주제가 극적인 화면 구성을 통하여 인상적으로 드러나며 화려한 색채와 자유분방한 붓 터치가 일품인 작품이다. 들라크루아는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화가들 중에서 최고로 꼽힌다. 낭만주의는 객관보다는 주관을, 이성보다는 감성을 중요시하고 개성을 존중하는 특징을 보인다.

들라크루아는 작품 주제로 신화, 문학, 역사를 아울렀으며 소재 역시 인물, 풍경, 정물 등을 가리지 않았다. 기법 측면에서도 유화 파스텔 수채화는 물론 판화까지 제작했고 벽화나 장식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는 인간을 표현할 때 자연 속 모습은 물론이고 현실을 초월한 영웅적인 면모도 담아내려 노력하였다. 파리의 중심가에 있는 생쉴피스(Saint Sulpice) 성당(댄 브라운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다빈치 코드’에 나와서 더욱 유명해진 바 있다)의 입구에 걸려있는 벽화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Jacob wrestling with the Angel)’(1861)과 같은 그림에서 그러한 들라크루아의 화풍을 찾아볼 수 있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그림 한가운데에는 하늘에 자욱한 포탄 연기 속에서 여인이 깃발을 들고 민중을 이끌고 있다. 관념을 의인화(擬人化)하는 유럽 회화의 전통에 비춰볼 때 이 여인은 실제의 인물이 아니라 자유의 여신을 상징한다. 옆에는 총을 들고 있는 어린 소년과 총칼로 무장한 민중들이 임시로 구축한 바리케이드를 넘어서고 있다. 화면 오른쪽으로는 노트르담 성당이 보인다. 자유의 여신이 들고 있는 프랑스 깃발은 자유 평등 박애 정신을 표방하는 프랑스 공화국을, 총을 든 어린 소년은 프랑스 미래를 상징한다. 국민군으로 참여했던 들라크루아는 자신의 모습을 여신 오른쪽에 정장을 입고 모자를 쓰고 총을 든 시민으로 그려넣었다.

그러나 당대의 비평가들은 이 그림을 맹비난했다. 그림 속 여인은 관념의 화신이지 살아있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전통에 따라 대리석처럼 하얗고 부드러운 피부로 묘사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들라크루아는 관례를 따르지 않고 여신을 살아있는 인간의 모습으로 그렸고, 비평가들은 여신을 ‘생선 파는 여자’나 ‘거리의 창녀’로 비유하며 악담을 퍼부었다. 들라크루아는 실제로 세탁 일을 하던 젊은 여자에게서 여신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에게 있어서 여신은 단지 ‘관념적인 자유’가 아니었던 만큼 현실에 실존하는 구체적인 여성상이 그림 속에 투영된 것이다.

 ◇프랑스는 왜 변혁의 땅이 됐나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은 바로 이러한 혁명적 상황의 프랑스를 배경으로 쓰인 소설이다. 동명의 뮤지컬 역시 같은 스토리라인으로 만들어졌다. 레미제라블에 묘사된 프랑스 시민들의 저항과 바리케이드와 총칼로 무장한 사람들의 모습은 1832년 6월의 시민저항군의 상황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이 6월 봉기는 2년 전 7월 혁명의 실패와 이에 따른 현실에 대한 불만이 다시 폭발한 사건이었다. 낮은 임금과 가난, 수만 명의 사망으로 이어진 콜레라 확산이 도화선 노릇을 했다.

19세기 프랑스 사회는 전례 없이 빈부의 격차가 심화된 시기였다. 프랑스 역사에서 혁명의 서막을 알린 1789년 대혁명은 당시 프랑스 사회의 빈부격차로 인한 가난과 굶주림 그리고 신분제에 대한 민중의 불만이 촉매가 되어 일어난 폭동의 결과였다. 대혁명 이후 프랑스 사회는 걷잡을 수 없는 전쟁과 혁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면서 경제는 더욱 파탄나게 되었다. 물가는 치솟고 민중의 고통은 극에 달했다. 혁명을 주도했던 로베스피에르는 1793년 정권을 장악한 뒤, 뛰는 빵값을 억제하기 위하여 ‘최고가격제’를 실시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는 2년 뒤 실각하고 최고가격제는 폐지되었으며 물가는 다시 치솟게 되었다. 참을 수 없는 가난으로 조카를 위해 빵을 훔치다 잡힌 레미제라블의 주인공 장발장 역시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탄생한 인물인 것이다.

당시의 프랑스 경제 상태는 체제의 변혁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 무렵 영국에서 불어닥친 산업혁명의 여파는 프랑스 경제를 더욱 격동의 시기로 몰아넣었다. 산업화의 파도가 급속한 농업의 해체를 불러오면서 농민들은 더욱 빈곤한 처지의 무산자(無産者) 계층이나 가난한 공장 노동자의 신세로 전락했다. 가난과 기아는 파리를 비롯한 프랑스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한편 프랑스의 산업화는 직물과 금속공업 등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장발장이 북부 소도시에서 구슬 공정을 개발하여 산업자본가가 된 것도 이때였다. 이 지역은 영국과 가까워 다른 지역보다 빨리 산업화가 진행된 곳이었다. 이러한 산업화 과정에서 부르주아 계층은 생겨났지만, 성장의 열매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경제성장의 이면에서 노동자들은 치솟는 물가와 턱없이 낮은 임금으로 더욱 심한 생활고를 겪었다. 이들의 불만은 팽창하였고 결국 민중 봉기로 터져 나왔다.

 ◇부르주아는 있고 노동자는 없었던 것 

1830년에 발발한 7월 혁명은 부르주아 계급이 보수 왕조로부터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쟁취한 혁명이었다. 그것은 하층 민중의 지지와 투쟁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들은 전반적인 사회의 변화를 요구했지만 부르주아 계층의 이해관계는 달랐다. 이들은 급격한 체제 변화보다는 현재의 체제 속에서 점진적인 개혁을 원했다. 이들은 오히려 노동계급에 의한 혁명적인 폭동 사태가 발발할 것을 두려워했다.

결국 1830년 7월 혁명은 미완에 그치고 말았다. 부르주아 계층이 반혁명세력인 귀족계급과 손을 잡고 타협해버린 것이다. 프랑스 제2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된 루이 필리프 1세(Louis-Philippe)는 공화정의 이념을 버리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그 후에 1848년 반체제 인사들의 주도로 대규모 항의 시위가 벌어지게 되자 루이 필리프 1세는 퇴위할 수밖에 없었다.

혁명은 성공했으나 이번에도 새 공화정의 다수파인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들은 혁명적 변화를 원하지 않았다. 끝내 민중혁명의 과정은 완전한 혁명을 달성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민중 계급은 기존 체제 내에서 이미 경제적 토대를 장악한 부르주아 계층의 이해관계를 넘어설 만한 조직적이고 물리적인 힘을 현실적으로 가지고 있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보면 그가 결코 과도한 감상에 빠지지 않으려 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그의 낭만주의의 화법은 개인주의적이라고 평가받기도 한다. 시인 보들레르(Charles Pierre Baudelaire)는 그를 회상하면서 이렇게 표현하였다. “들라크루아는 ‘열정’에 열정적으로 사랑에 빠져 있었으나, 열정을 표현하는 데에는 가능한 한 명료하고 냉정했다.” 그만의 낭만주의적 화법은 가슴 속에 품은 열정을 표현하면서도 객관성을 유지하고 냉정함을 잃지 않는 것이었다.

들라크루아의 작품들을 소장한 들라크루아 미술관(Musee National Eugene Delacroix)은 파리 시내 생제르망 거리 근처의 조그마한 광장인 퓌르스탕베르(Furstemberg) 광장 바로 옆에 있다. 그의 생애와 다양한 작품활동을 둘러볼 수 있는 좋은 곳이다.

최병서 동덕여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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