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풍경화같은 화면/귀족들의 에로티시즘/그속에서 펼쳐지는 난해한 수수께끼「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89)를 비디오로 흥미있게 본 사람이라면 피터 그리너웨이(56) 감독의 82년 작 「영국식 정원 살인사건」(28일 개봉)이 무척 반가울 것이다.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 구조와 난해한 형식으로 유명한 그의 명성은 이 작품에서도 확인된다. 원제 「제도사의 계약」(Draughtman’s Contract)에서 알 수 있듯 영화는 17세기 왕정복고 시절 한 영국 귀족집안과 제도사가 계약을 맺는데서 시작한다. 당시 귀족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뽐내기 위해 제도사를 고용해 정원을 그리게 하는 관례를 가지고 있던 것.
허버트 부인과 제도사 네빌의 계약은 이렇다. 남편에게 선물할 정원그림 열두장을 그려주는 대신 그가 원할 때마다 성관계를 갖는 것이다. 사실 묘사에 까다로운 제도사가 정원을 그리는 도중 정원의 연못에서 남편의 시체가 발견된다. 허버트의 딸인 탈만 부인은 제도사에게 접근, 그의 그림속에 아버지가 살해됐다는 각종 증거가 담겨 있으며 이는 그가 살인에 대해 미리 알고 있음을 나타내 준다고 지적한다. 다시 제도사와 딸이 두번째 계약을 맺는다. 딸은 이 사실에 대해 입을 열지 않는 대신 그와 성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 관객들은 도대체 누가 범인이며 계약들이 무슨 의미인가 궁금해진다. 그러나 호기심을 잔뜩 불러 일으킨 영화의 결말은 허무하다. 허버트 모녀의 계약들은 남편의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대를 이을 후손을 필요로 했던 계략이었던 것이다. 제도사는 집안의 남자들에 맞아 죽는다.
성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 주목해온 피터 그리너웨이의 영화는 워낙 현학적이고 형식적이어서 대중들의 접근을 쉽지 않게 만든다. 지적인 게임을 즐기는 그의 이번 작품은 영화와 예술의 관계, 혹은 귀족과 평민의 알력 또 페미니즘의 문제의식에 대한 우화로도 읽힌다.
그러나 영화 속의 숨은 의미들을 읽지 못한다고 해서 영화를 잘못 보는 것은 아니다. 감독 역시 관객들에게 그렇게 얘기한다. 한껏 점잔을 빼는 귀족들의 말투, 하늘을 찌를 듯한 가발과 치렁치렁한 의상, 한때 화가가 되려고 했던 감독이 만들어낸 멋진 풍경화 같은 화면, 묘한 에로티시즘의 분위기, 그리고 당시의 음악형식을 재현한 마이클 니만의 변주곡 등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다른 영화에서 느낄 수 없는 색다른 만족을 얻을 것이다.<이윤정 기자>이윤정>
▲조혜정(영화평론가)색채와 이미지의 미로속에서 벌어지는 매혹적인 살인게임.(★★★☆) ▲김시무(영화평론가)싱그러운 영상의 「녹색영화」(★★★☆)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