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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강 판 김선달, 스마트폰 시대엔 뭘 팔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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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강 판 김선달, 스마트폰 시대엔 뭘 팔까?

입력
2015.01.01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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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봉이 김선달은 한양 장사치들에게 대동강 물을 팔아먹었다는 평양의 익살꾼이자 재담꾼이다. 좋게 말해 재담꾼이지 사기꾼이나 다름없다. 허풍과 재치로 어리숙한 이들을 골탕먹이고 이득을 취한다. 남의 약점을 들춰내 사욕을 채우기도 하고, 물정 어두운 타지인을 속여 거금을 챙긴다. 노자를 마련하기 위해 일부러 물에 빠진 뒤 자신을 구해준 나그네에게 보따리를 내 놓으라고도 한다. 이런 악질 사기꾼 김선달이 스마트폰 시대에 살았다면 어땠을까? 현대판 봉이 김선달의 한바탕 사기극을 상상해 봤다.

서울 용산전자 상가 인근의 한 허름한 휴대폰 대리점. 손님이라곤 코빼기도 안 보이고 주인인 듯 보이는 이는 비스듬히 의자에 기대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다. 사내는 물벼락이라도 맞은 듯 부르르 떨며 잠에서 깬다. 이 사람이 바로 봉이 김선달이다. 별 거 없어 보이는 몰골이지만, IT업계에선 나름 알아주는 해커다.

“이거 원, 그 놈의 단통법인지 뭐시긴지 때문에 휴대폰 팔아먹기도 예전 같지 않구먼. 뭐 신나는 일 없나.”

지난해 10월 1일 단통법이 시행됐다. 단말기 값이 올랐단 얘기다. 휴대폰 매장에 고객들의 발길이 끊겨 썰렁하다. 배우한기자 bwh3140@hk.co.kr
지난해 10월 1일 단통법이 시행됐다. 단말기 값이 올랐단 얘기다. 휴대폰 매장에 고객들의 발길이 끊겨 썰렁하다. 배우한기자 bwh3140@hk.co.kr

한참을 고심하던 김선달이 벌떡 일어나 짐을 주섬주섬 챙겼다. 코딱지만한 휴대폰 대리점에 처박혀 있기도 답답하고 해서 명동 나들이를 가기로 한 것.

“명동에 가면 대륙의 큰손들이 많다고 했겠다. 명품 사들이는 걸 보면 돈도 많은 사람들 같은데, 옷가지나 화장품 나부랭이만 팔아서야 쓰나. 장사를 하려면 통 크게 제대로 해야지.”

김선달은 명동에 가서 중국인 관광객이 가장 많이 드나드는 가게들 10여 곳에 들러 직원들을 구워 삶았다. 해커 짓 해서 벌어놓은 돈으로 고가의 물건도 팍팍 사고, 지연 학연 혈연 다 갖다 붙여 거하게 술도 대접했다. 어느 정도 친분을 쌓고 난 뒤 이들을 한 자리에 모아 술판을 벌였다. 다들 거나하게 술이 취했을 즈음,

“내가 지금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데, 여러분이 좀 도와주면 아주 재미있는 일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이번 일이 성사되면 여태까지 한번도 못 가봤을 아주 근사한 곳에서 제대로 쏘겠습니다.”

눈이 휘둥그레해진 사람들이 앞다퉈 물었다.

“김선달께서 하시는 부탁인데 못 도울 일이 있겠습니까 . 염려 마십시오. 근데 대체 뭘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는지요?”

“자, 그럼 제가 여러분들에게 현금 150만원씩을 드릴 테니, 내일부터 제가 가게에 찾아가면 제게 10만원씩만 주시면 됩니다. 그렇게 한 2, 3일만 하면 됩니다.”

명동 상인들은 그리 하겠노라고 약속을 한 뒤 150만원씩을 받고 헤어졌다.

여기가 한국인가 중국인가. 명동엔 중국인 관광객이 한국 사람보다 더 많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행인들 지나갈 틈도 없이 중국인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룬 명동거리.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k.co.kr
여기가 한국인가 중국인가. 명동엔 중국인 관광객이 한국 사람보다 더 많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행인들 지나갈 틈도 없이 중국인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룬 명동거리.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k.co.kr

다음날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 입은 김선달은 중국인 관광객이 가장 많이 드나드는 시간에 약속된 가게들을 돌아다녔다. 가게에 들어설 때마다 사람들이 관심을 갖도록 일부러 요란법석을 떨었다. 김선달이 들어오자 가게 직원들은 과장되게 굽신거리며 10만원씩을 건넸다. 김선달과 점원은 유창한 중국어로, 일부러 큰 소리를 내며 대화를 나눴다.

“자네, 밀린 주파수 값이 100만원인데 알고 있나?”

“물론 알고 있다마다요. 안 그래도 내일 오실 땐 다 갚아드리려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가게 직원이 그럴 듯하게 맞장구를 쳤다.

이들의 대화를 들은 사람들 중 중국인 사업가 일행도 있었다. 이들은 저희끼리 수군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파수 값이라고? 무슨 주파수 값일까?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어디 가서 한 번 물어보자고.”

“당신이 받는 주파수 값이 대체 뭔지 궁금하다”는 중국인 관광객들의 말에 김선달은 ‘당연한 걸 왜 물어보냐’는 듯이 퉁명스레 말했다.

통신비가 너무하다. 단말기 값 할부금에 이래저래 합치면 10만원 언저리다. 이동통신요금인하를 요구하는 퍼포먼스는, 시민단체들이 잊을 만하면 선보이는 단골 레퍼토리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통신비가 너무하다. 단말기 값 할부금에 이래저래 합치면 10만원 언저리다. 이동통신요금인하를 요구하는 퍼포먼스는, 시민단체들이 잊을 만하면 선보이는 단골 레퍼토리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 답답한 양반들 보시게. 당신네들 외국 여행가면 호텔에서 무선 인터넷 이용료 내시오? 안 내시오? 비싼 데는 하루에 몇 만원씩 한단 말이오. 근데 통신강국 대한민국에선 스마트폰만 있으면 어지간해선 공짜로 인터넷 쓰잖소? 그것도 광대역으로다가. 본래 주파수라는 것이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나라에서 관리하는 것인데, 나랏님이 이동통신사들에게 어마어마한 비용을 받고 경매로 팔아넘기니 그 이용요금은 고스란히 또 국민들이 호갱님 소리 들어가며 부담하는 거 아니오? 통신강국이 괜히 됐겠소? 국민들이 그만큼 돈을 많이 내니까 그런 거요. 헌데 당신들 외국인은 그 혜택을 이용만 하고 돈은 안 내지 않소? 그럼 그 돈을 누군가는 내야 할 테고, 결국 당신들이 이용하는 가게에서 그 비용을 대신 부담하는 거요.”

중국인 관광객들은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중국의 부패 척결 희생자(?)인 보시라이(왼쪽)와 저우융캉. 한국일보 자료사진
중국의 부패 척결 희생자(?)인 보시라이(왼쪽)와 저우융캉. 한국일보 자료사진

“당신 말씀이 맞다 칩시다. 그런데 왜 가게에서 당신한테 돈을 주는 겁니까? 주파수가 당신 거라도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쯧쯧, 내 것이니까 팔지 남의 걸 어찌 함부로 팔겠소? 여튼 그 내력을 말하자면 우리 집안 족보를 들춰가며 봉수대며 전보며 삐삐며 씨티폰 개발 등등 통신강국 건설에 혁혁한 공을 세우신 어르신들 얘기도 해야 할 것이며, 당신들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려면 보시라이며 저우융캉이며 이런 사람들의 재테크 비법도 누설해야 하니 더 이상 묻지 마시오. 중요한 건 외국인 관광객 1인당 요금을 받아도 모자랄 판이지만, 뭉뚱그려 하루에 단돈 10만원의 저렴한 정액 요금제를 책정해서 소상공인과 상생하려는 내 노력을 아무도 몰라준단 거지. 나랏님이 내 희생정신을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매일같이 서울시내 수많은 가게들을 돌아다니기도 버겁고… 적당한 사람 나타나면 물려줄 요량이긴 하오만.”

하루에 서울에서 돌아다니는 수많은 외국인 관광객을 계산하던 중국인 사업가 일행은 돈에 눈이 뒤집혔고, 결국 김선달에게 10조 5,500억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외국인 전용 주파수 판권을 사들였다. 그리고 다음날 중국인 사업가들은 가게를 돌며 주파수 값을 받으려 했으나 문전박대를 면치 못했다. 그제야 된통 속은 것을 깨달았으나 김선달은 이미 홀연히 사라진 뒤였다.

김경준기자 ultrakj75@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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