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베르트를 연습하는데 문득 김소월의 시 ‘길’이 떠올랐다. 끝이 없는 길을 걷다가 ‘열십자 복판’에서 방향을 상실한 나그네의 쓸쓸한 유랑. 그러고 보니 두 청년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30대 초반 재능을 채 만개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난 것이나, 기질적으로 유랑인의 생리를 타고난 것이나, 이별의 정한을 사무치게 토로한 것이나, 단순한 형식과 민요의 정서에 주목하며 낮은 사람들의 삶에 애착한 것이나… 시의 전문을 다시 찾아보던 중 역려과객(逆旅過客)이라는 해설이 눈에 박혔다. 세상은 여관과 같고 인생은 그곳에 잠시 머무는 나그네와 같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를 함께 연주하는 첼리스트와의 첫 리허설. 그는 만나자마자 슈베르트의 ‘자필악보’를 펼쳐 보였다. 현대의 인쇄기술로 깔끔히 출력된 악보에만 익숙해져 있다가 작곡가가 직접 오선지에 그려 넣은 악보를 대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슈베르트는 노심초사 끝에 음표를 쥐어짜낸 작곡가는 아닌 듯 했다. 그리다가 중도에 그만 둔 부분이 눈에 뜨이거니와, 한눈에도 쉽고 빠르게 작곡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음악을 조직적인 구조로 체계화하는 작업에 별반 매력을 느끼지 않았던 것 같았다. 대신 하나의 선율이 떠오르면 느낌이 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풀어내며 순간의 감흥과 흐름의 표현에 중점을 두었다.
프로그램의 구성단계부터 ‘방랑’의 연속이었다. 여러 가능성을 열어두고 이곡 저곡을 조합하며 다가갔다. 접근경로를 하나로 통합하기보다는 되도록 다양한 경로를 두고 싶어 하는 개인적 성향을 새삼 깨달았다. 프리즘을 관통한 다채로운 색광으로 ‘산만하게’ 접근하다 보면, 언젠가 돋보기로 빛을 모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잃지 않기 위해 연습과정 내내 스스로를 독려했다. 슈베르트의 많은 가곡에서 시적 화자는 돌아갈 곳 없이 방랑하는 청년이다. 정처없이 떠돌던 중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나, 그럴듯한 고백 한번 못해보고 속으로만 앓는다. 기껏해봐야 바람에게, 시냇물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해달라 소극적으로 의탁할 뿐이다. 여인은 이내 조건이 좋은 다른 남성에게 떠나간다. 사랑에 거부당한 청년의 좌절은 처연하다. 낙담을 토로할 상대는 여전히 바람과 시냇물과 같은 주위의 자연뿐이다.
이 작곡가를 특징짓는 열쇠말을 ‘방랑과 실연’이라 거칠게 가정할 때, 이를 음악어법과 연관시켜 탐구하는 것은 연습과정 내내 크나큰 즐거움이었다. 예컨대, 닿을 수 없는 것에 대한 동경은 끊임없이 부유하는 비화성음의 연속적인 패시지로 표현되고 있으며, 한 곳에 정주하지 않는 불안정한 동요는 원운동으로 순환하는 선율을 교란시키는 직선운동으로 형상화되어 있기 마련이다. 그가 즐겨 사용했던 3도권 (mediant relationship)으로의 예기치 않은 전조는 꿈에서 의식 세계로, 혹은 아련한 옛 추억에서 현실세계로 깨어나는 듯한 효과를 자아내면서 그의 몽환적 성격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이를테면 슈베르트 가곡 ‘방랑자’의 화자는 “나는 어디에서나 불행한 이방인”이라 탄식하며 “어디로 가야 행복을 찾을 수 있는지” 끊임없이 묻는다. 그러자 유령 같은 바람이 대답한다. “그곳, 네가 없는 그곳에 행복이 있다.” ‘물위에서 노래함’은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는 자연을 예찬한 곡이다. 그러니 프레이즈마다 올올이 투영된 ‘자기연민’을 경계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한번 빠져들면 헤어 나오기 힘들 정도로 달콤한 유혹이었다. 이를 음악적(!)으로 극복해야 했지만, 창밖에선 진짜로 한 겨울의 칼바람 소리가 들려오고, 그 꽁꽁 얼어붙은 벌판을 오직 사랑했던 사람을 잊기 위해 걸어갔던 방랑자의 토로를 직접 연주하자니 과도한 감정이입에 빨려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애착하는 대상에 간격을 유지하는 일은 그만큼 녹록하지 않다. 슈베르트를 비롯한 낭만주의의 많은 예술가들이 편애해마지 않았던 방랑자의 모델은 시대와 현실에 대해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는 무력한 인간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그네의 실존적 몰락과 자아 상실은 도금이 입혀진 시대의 허위를 벗겨내고 부당한 사회현실과 특권층의 횡포를 알리는 준엄한 고발이지 않았을까.
조은아 피아니스트ㆍ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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