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문제 선제적 해결 입장서 정상회담으로 풀어보겠다는 전략
日서 법은 절대적인 것이지만 한국선 '실질적 정의'로 간주
'정치인' 아베 국익위한 확신 서면 침략ㆍ사죄 언급 가능성 배제 못해
한일관계 전문가 기미야 다다시(木宮正史) 도쿄대 교수(한국연구센터장)는 국교정상화 50주년 행사에 양국 정상이 전격 참석하는 등 돌연 한일관계 회복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과 관련해 “박근혜 대통령이 현재 분위기를 주도적으로 만들고 있다”며 “과거와 달리 위안부 문제 협상에서 진전을 보면서 정상회담에서 이 문제를 풀어보겠다는 쪽으로 전략이 바뀌었다”고 평가했다. 기미야 교수는 23일 도쿄대 고마바(駒場)캠퍼스 연구실에서 진행된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박 대통령이 위안부 문제를 정상회담의 전제조건으로 못박던 기존입장을 바꿔 회담의 의제로 다룰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 돌파구가 됐다고 해석했다. 박 대통령이 대일 관계 회복에 적극성을 띠는 배경에 대해 기미야 교수는 “최근 박근혜 대통령의 국내에서 정치적 입지가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경우보다 더 어렵기 때문”이라며 “그러나 박 대통령의 노선변화로 이제 공이 아베 신조 총리에게 넘어가 일본정부가 뭐든 해야 하는 식으로 국면이 바뀌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또 전후70년 담화가 아베 총리의 개인담화 형태로 발표될 가능성이 부상하는데 대해 “스스로 70년 담화를 내겠다고 해놓고선 비판을 받으니까 각의결정(국무회의 의결) 없이 한다는 것은 근본적인 역사문제인데도 너무 가볍게, 담화를 왜소화시키며, 표면적인 대응만 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_몇 일 사이 한일관계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정상회담까지 이어질 수 있겠나.
“최근까지 세계문화유산 등재 문제까지 악재가 줄줄이 이어져 왔는데 이번 계기로 양국관계의 악화는 좀 진정될 것 같다. 세계문화유산 문제는 분명히 일본이 양보한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일본 쪽 분위기를 바꿔보자는 의지가 있었던 것 같다. 지금까지 위안부 문제를 비롯해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선 아베 총리와 만나지 않겠다며 각론으로 일본을 압박해오지 않았나. 그러나 지금 박근혜 정부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아베 총리가 안보법제 문제로 국내 지지율이 떨어지고 있지만 박 대통령 쪽이 국내적으로 더 어려운 처지라는 점도 원인일 것이다. 하지만 아베 총리가 자신은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데 저쪽에서 반응이 없다는 자세였는데 이젠 일본 측이 뭔가를 답해야 하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_정상회담 성사와 관련해 한일간 국면이 바뀐다는 의미인가 .
“위안부 문제를 넘지 못해 ‘정상회담 없는 정상화’였다. 위안부 문제를 주도적으로 풀어야 할 책임은 일본정부에게 있다. 그것을 박 대통령이 아베 총리를 직접 만나서 요구하고 호소해야 한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일본이 먼저 타협하기 전에는 만나지 않겠다는 자세였다. 그러다 보니 아베 총리도 초조해 하지 않았다. 부담스럽지 않은 것이다. 한국은 강경하기 때문에 배려를 할 필요가 없다는 분위기에서 오히려 박 대통령이 부드러운 자세로 바뀌면 아베 정부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고민하는 상황이 된다. 만일 여성인 박 대통령이 직접 아베 총리에게 여성인권을 얘기하거나 생존 할머니들에게 미안하다고 한 말을 정식 메시지로 옮기고 지키라고 요구한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박 대통령이 위안부 문제를 정말 해결하고 싶다면 정상회담을 하는 것이 유리하다.”
_위안부 협상의 세부내용은 어떻게 평가하나.
“요즘 언론에 2012년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정권때 만들어진 ‘사사에안’이 다시 거론되고 있다. 당시 한국 외교부는 일본이 법적책임을 인정하지 않아서 거절했다고 하는데, 나중에 이명박 대통령이 그 내용을 알고 그 정도는 타협할 수 있었다고 했다는 말도 있더라. 그런데 지금 나오는 얘기를 보면 일본 입장에선 ‘사사에안 플러스 알파’지만 한국에겐 여전히 부족한 안이다. 위안부 소녀상 철거도 그렇고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 해결을 한국정부가 보증하기 어려울 것이다. 다만 일본에서 노다 정부가 한 사사에안에 보수적인 아베 정부가 접근했다면 그것 자체도 놀라운 일이다.”
_일본은 한국 내부의 민간단체 목소리가 장애요인이란 주장을 한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경우 처음에는 법적책임이란 말에 집착했지만, 지금 운동단체들간에 다양한 입장차가 있는 것 같다. 법적책임 자체에 집착하기 보다 일본이 하는 행동에 따라 조금 유연하게 바뀌고, 한국정부도 그 점을 활용하는 쪽인 것 같다. 한국정부로서도 정부 책임하에 뭔가를 얻어내길 바라기 때문에 법적 책임이라는 말을 고집하는 것보다, 효과나 결과로서 일본정부가 주체적으로 성과를 내놓았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을 필요로 할 것이다.”
_전후 70년 담화가 가장 중요한 고비가 되지 않겠나.
“지금까지의 아베 총리 행동을 봐선 한국인의 기대를 충족시기키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식민지 지배, 침략, 사죄 등을 절대 언급 안한다고 보기도 어렵다. 아베 총리는 정치인이다. 정치인답게 행동할 줄 안다고 본다. 그것이 일본의 국익을 위해 필요하다고 확신한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럼에도 아베 총리 역시 박 대통령을 닮아서 고집이 세다. 낙관적으로 볼 수 없다. 총리관저의 분위기는 지금까지 한국이 요구하면 일본은 받아주고 양보하고, 정작 한국 쪽에선 그다지 고마워하지 않아 양국관계가 악화됐다는 인식이 강하다.”
_아베 담화가 개인담화로 위상을 낮춰 발표될 가능성이 거론된다.
“주변에선 말을 안하는 데 스스로 70년 담화를 내놓겠다고 해놓고서 비판을 받으니 각의결정 없이 하겠다는 것은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원래부터 70년 담화를 내지 않겠다고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담화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너무 표면적, 표피적으로 대응하는 자세다. 역사문제나 식민지, 인권 문제 같은 것들은 세계적으로 규범적인 의미가 너무 커졌고 일본정부는 이런 문제들을 너무 소홀히 보고 있다. 세계적 기준이 완전히 달라지고 있다. 가해자가 뻔뻔스럽게 말할 수 없는 문제다.”
_한일수교 50년을 맞아 전문가로서 느끼는 소회를 말해달라.
“한국을 연구한지 30년이 됐다. 한일간 50년의 전반기 25년은 냉전기였다. 김대중 납치사건이나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 등 1970년대는 사건들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한일 유착기였다. 똑같이 냉전체제 반공자유진영에 속했고, 한국은 북한의 남침을 막고 남북경쟁체제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일본의 협력이 필요함을 공유했다. 그런 구심력이 있었다. 그러나 후반기 25년은 기복이 심했다. 90년대 이후는 자유로운 문화개방으로 가까워졌지만 그만큼 마찰이 많이 생겼다. 멀면 접촉도 없고 마찰도 생기지 않는다. 가까워질수록 마찰이 생기는 것이다.”
_1965년 한일협정 체제의 청구권 문제가 양국간 모순으로 등장했다.
“법률가는 아니지만 상식적으로 보면 한일협정으로 끝난 문제다. 하지만 법을 대하는 양국민의 인식에 많은 차이가 있다. 일본에서 법은 절대적인 것이다. 그래서 1965년 청구권협정에서 위안부 문제 등이 최종적으로 해결됐으니 아무리 문제가 있어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법은 절대적인 것이라기 보다 실질적인 정의란 측면에서 간주한다. 그렇게 되면 1965년에 아무리 약속을 했어도, 위안부 피해자나 강제징용자들이 충분히 보상받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 않나. 그래서 양국이 타협해야 할 부분이 있다. 한국 법원들의 판결은 65년 협정체제와 괴리가 너무 심하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측이 ‘위안부 피해자의 청구권에 한국정부가 나서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고 규정한 헌법재판소 결정(2011년)은 일본 측에 타협을 요구하는 대신,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개인청구권이 소멸됐다고 보기 어렵다’는 대법원 판결(2012년)은 한국이 책임지고 내부에서 해결하겠다고 서로 교환해야 한다고 본다.”
기미야 다다시 교수는 1960년 일본 시즈오카(靜岡)현 출신으로 도쿄대 법대를 나왔다. 1980년대 고려대에서 유학한 경험이 있다. 군사정권이나 민주화 시위정국을 모두 경험해 한국사회를 깊이 있게 아는 전문가로 평가된다. 박사학위 주제는 ‘박정희 정부 초기 경제정책을 둘러싼 한국정치’다. 그는 인터뷰 과정에서 ‘김대중ㆍ오부치 공동선언’(1998년 10월8일) 당시의 한일 화해무드를 자주 언급했다. 그는 “가장 기쁘고 감동받았던 것은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이 일본국회에서 평화헌법이나 전후 일본 국민의 평화주의를 높이 평가했던 장면”이라며 “한국의 지도자가 일본의 군사대국화나 군국주의를 많이 비판해왔지만 일본의 평화주의를 높이 산 것은 처음이었다. 그때 한일관계가 새로운 단계로 올라섰다는 희망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도쿄=글ㆍ사진 박석원특파원 s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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